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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의 발자취 미해결건 그리고 후기


서론
 

지난 2015년 7월 25일에 선친의 미국 발자취를 썼다. 하지만 모든 의문을 해결한 건 아니었다. 그 중 세가지 의문이 남아있어서, 최근 계속 문의와 추구를 하여서 부분적으로 해결을 보고 나머지는 영구히 미해결로 남겨 놓았기에, 나머지 정리를 하려고 한다. 크게 나누어서 세가지 문제들이다. 아래에 우선 목차부터 쓰겠다.

I. 미국 선교사에 의한 자금 횡령 건
II. 선친의 미국주소: 뉴욕주 뉴욕시 서부 115번가 633번지
III. 오래된 사진 넉장

I. 한국에서 미국으로 계획한 송금의 차질로 인한 선친의 재정적 곤란


선친은 만 십 세경 1903년에 자신의 삼촌(나의 종조부)과 함께 미국에 유학을 오셨다.
조부님은 서울에 거주하던 미 선교사에게 한국에서 미국까지 송금건을 의뢰하셨다. 큰 부호인 조부님은 부친과 종조부에게 미국체류기간동안 필요한 교육비와 생활비에 충당할 충분한 금액을 정기적으로 선교사를 통해서 송금하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선친의 후견인 종조부(從祖父)께서는 송금 액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서 두 분의 재정적 곤란은 10여년 체류기간동안 계속되었다.
다음과 같은 대단한 곤란을 겪으셨다고 나는 모친으로부터 들었다.

부친은 학비가 조달되지 못해서 학급 1년을 마치지 못하셨는데 그 해가 1911년임을 학교기록에서 발견하였다.
몇 달 동안 돈이 다 떨어져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고, 동네가게에서 식사대신 아이스크림을 외상으로 잡수셨는데 많이 수척하셨다고 한다.
긴 겨울에는 자신의 수양모 집을 비롯하여 동네 집 눈을 치웠는데, 한 번에 몇 전 씩 받았고, 또 수양모 미스 엘리(이름이 확실치 않음)가 자기 집에 와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까지 하였다.
그러한 상황이 계속되어서 10년 후에 송금문제를 해결하고자 1914년에 일시 귀국을 하셔서 조부님과 상의하여 해결책을 마련하신 후 귀교하려고 하실 때,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전 세계의 해상 봉쇄 령이 내려 태평양횡단여객선 운행이 중단되어 미국에 오실 수 없어서 국내에 정착하시고 가산관리와 결혼을 하셨다.
내가 한국에서 어머니로부터 이 말씀을 들을 때 그때가 오래전 옛날이었기에 당연히 국제간 송금이 그렇게 힘들었다고 하셨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내가 1985년 두 번째 부친 모교 윌리스턴 스쿨 동창회사무실에 방문하였을 때, 직원이 내게 오래된 편지를 보여주면서 혹시 나와 혹은 부친과 관계가 있는 서신이 아니냐고 물었다.
어떤 미국인이 Jewhan Chung 즉 나의 종조부인 정지환씨에 관해서 문의한 편지다.

그래서 내가 즉각적으로 알게 되어 그 편지 사본을 받고 집에 와서 읽어보니, 이 편지는 정지환씨의 지인(知人), “촬스 이디 페이”란 미국인이 정지환씨의 송금문제를 알게 되어 그를 도우려고 장로교 외국선교위원회에 접촉하여 회계담당자 “드와이트 에이취 데이”씨에게 이 문제를 제기하여 오랜 시일이 걸린 후 결국 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손해액을 보상하기로 결정하고 정지환씨에게 지불할 수표를 발행하여 페이씨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를 쓴 해가 1956년이었고, 내가 처음으로 읽은 때는 1985년이었다.
물론 페이씨가 정지환씨의 주소를 가졌을 리가 없어서 이 두 분 즉 부친과 종조부의 모교인 Williston Seminary에 편지로 문의하였지만 모두 허사가 되었다. 내가 연도별로 설명하자면 종조부님은 1916년에 국내에서 병사하셨고, 부친은 1954년에 돌아가셨다. 결국 페이씨는 결국 그 수표를 외국선교위원회에 반송하였겠고, 또 내가 추후에 알아본 정보를 이용하면 페이씨는 편지 쓴 다음해 1957년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그러니 이 편지내용은 그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의 횡령으로 부친과 종조부님의 재정곤란이 일어났음을 증명한 서신이다. 그러면 그 부정직한 장로교선교사는 누구인가?
어머니는 물론 모르셨겠고, 아버지는 아셨겠지만, 이런 정황이 결국 1956년 혹은 그 직전에 해명되었으니, 아버지와 종조부께서는 큰 의문이 있었어도 누구에게 말씀하지는 않으셨다고 나는 믿는다.

이 시점에서 나는 알아보고 싶었다. 우선 세가지 의문이 앞선다.
첫째 그 미국인 선교사의 이름, 둘째 횡령 금액, 셋째 장로교 선교위원회에서 정지환씨에게 지불을 명시한 수표 금액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친은 윌리스턴 세미너리에서 1909년부터 1913년까지 4년간 수업하셨는데, 종조부는 같은 학교에서 1906년부터 1910년에 졸업하고 콜로라도 광산대학에 입학하셨다.
그래서 나는 부친과 종조부 이 두 분의 학교기록을 요청하여서 받았는데 종조부 기록 중에 한 장의 정리용 카드(file card)와 그 안에 타자 내용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윌리스턴 학교에서 연락인으로 한국 서울시 “조지 에이취 존스” 박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름을 추적하였더니 그가 바로 그 당시 한국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미국인 선교사였다. 자, 이러니 당연히 나의 관심은 그에게 쏠렸다.
내가 증명까지 할 수는 없어도, 그가 송금을 담당했던 선교사였겠고, 또 횡령을 자행하였던 선교사였을 것이란 심각한 의심이 생겼다. 그러니 존스 박사는 종조부에게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이름을 썼던 카드가 학교 영구기록에 100여년간 보관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그의 횡령사실이 밝혀졌기에 장로교외국선교위원회에서 페이씨를 통하여 손해액을 수표로서 보상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아래에 그에 관해서 좀 더 자세히 기록하겠다. 이리하여 나는 다음 몇 곳에 문의하여 장로교 외국선교위원회에 접촉을 시도하였다.
첫째 뉴욕주 로체스터시 장로교회에 연락하였으나 회신조차 없었다.
둘째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시에 있는 장로교사학회에 연락하여서 정보제공기록보관담당자, 그리고 연구원에게 문의하였지만 그 시기가 원래 오래되었고, 기간이 너무 길어(1903~1956) 기록 분량이 방대하고 조사기간이 너무 길어서 자신들이 할 수 없고 나에게 직접 와서 소장 서적을 읽어보라고 하는데 나의 집에서 워낙 멀고 또 기록을 찾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중단하였다.
셋째와 넷째 브로드웨이 장로교회와 뉴욕시 장로회에 연락하였으니 결과가 없었다,
다섯째 외국선교위원회의 현재후계자가 장로교선교단체가 되었다고 하여 그리로 연락해보니 다시 장로교사학회로 넘기려고 하여 결국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주 이유는 시일이 워낙 오래되었고, 현직원이 성의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촬스 이디 페이씨의 친필편지이며 그 다음에는 한글번역이다

 

촬스 이디 페이씨의 친필편지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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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스 이디 페이씨의 편지 타이프 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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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스 이디 페이씨의 편지 한글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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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 논의

  내가 1956년 1월 8일 일자의 “촬스 이디 페이” 씨의 편지를 읽을 때까지, 1903년부터 1914년까지의 선친의 재정적 곤란은 그 당시 국제송금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고 어머니로부터 들어서 당연한 상황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송금은 한국 서울에 거주했던 미국 선교사가 담당하였고, 물론 그 당시에 국제전화나 태평양을 통과하는 항공기가 없었기에 대단히 힘들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내가 이 편지를 읽었을 때 나의 이해가 완전히 변하였다. 선친의 송금 곤란은 국제간 송금 문제가 아니라 이 선교사의 횡령때문이었음이고 이 횡령은 10여년간 그가 자행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외국선교위원회에서 그 손해액의 보상을 하기로 결정하였고, 결국 선친의 후견인인 종조부 정지환씨에게 지불할 금액의 수표를 발행했기에 증명된 사실이다. 물론 이 편지를 썼던 1956년에는 종조부는 1916년에, 그리고 선친은 1954년에 돌아가셨고, 내가 이 편지를 읽었던 1985년에는 이미 29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게다가 내가 1985년 당시에는 개업하느라고 대단히 바빠서 이 문제에 집중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이 일을 거의 잊었을 때 우연히 선친의 기념사진을 나의 모교 사진전에 참여하는 기회에 다시 선친과 종조부님에 관련된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2015년이었다.

최근에 나는 미국 장로교회의 역사에 관하여 다음 정보를 장로교사학회로부터 얻었다.

미국에서 장로교해외선교위원회는 1837년에 조직되어서 존재하다가 1958년에 그 활동이 미국내에 통합된 장로교회의 위원회로 이전되었고, 1972년에는 통합장로교회의 계획국으로 대치되었다.
1983년에는 통합장로교회와 장로교회가 재결합되었고, 1988년에는 재결합된 장로교회의 일반 상임위원회가 형성되었다.
그 후 2008년에는 일반상임위원회가 일반상임 임무위원회로 개명되었고, 2012년에 현재의 장로교임무단체로 개명되었다.

그러니 지환종조부님이 겪었던 횡령건의 책임기관인 장로교해외선교위원회는 1837년부터 1958년까지 존재하였고 그 후에는 다른 기관으로 이전되었다.
페이씨의 편지가 1956년이었고, 또 그 직전쯤 수표를 발행한 이유는 아마 그 위원회에서 종료하기 전에 금전관계를 마무리하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환씨는 1916년에, 선친은 1954년에 그리고 페이씨는 편지 다음해인 1957년에 모두 사망하셨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났다.

아래에 나의 추리가 있다.
이 횡령건이 자행되었던 시기는 1903년부터 1914년까지 선친과 종조부 두 분이 미국에 계실 때였다. 그리고 종조부 Jewhan Chung께서 Mr. Charles Edey Fay에게 이 일을 부탁하였을 때는 분명히 1906년부터 1910년까지 Williston Seminary학생시절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1910년에는 Seminary 졸업하셨고, Colorado School of Mines, Golden, Colorado로 가셨으니, 아무래도 떠나시기 전에 이 일을 의뢰하셨고, 또 Mr. Fay도 종조부가 떠나기 전에 이 일을 추진하셨을 거로 믿는다.
그런데 1910년이전에 시작되었던 일을 어찌하여 1956년 혹은 그 직전에 마무리되어서 수표까지 발행하게 되었는지 이 일을 하는데 1956-1910=46년 혹은 그 이상의 시일을 요했는가하는 의문이다. 도저히 납득이 될 수 없는 지연이다.
상기의 정보에 의거하여 나대로 추리하였다. 아마 이 사건을 무시하였는지, 실수로 누락되었는지간에 그동안 묵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Board of Foreign Missions가 1958년에 해체되려고 하니, 그동안 해결을 못했던 문제를 재조사하게 되어 이 일을 다시 부각하여서 뒤늦게 수표를 발행하였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이 얼마나 불행하고 억울한 일인가? 이제 책임자들은 모두 떠났고, 그 기관 자체도 없어졌으니!

아래에 내가 장로교 사학회로부터 받은 편지를 복사하였다.

 

장로교해외선교위원회에서 장로교임무단체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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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남은 의문은 도대체 그 악덕 미국선교사는 누구인가? 물론 조부님, 종조부님, 그리고 틀림없이 선친 이 분들은 그 선교사를 알고 계셨을 것이다.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어머니는 물론 모르셨다. 이 편지를 썼던 페이 씨도 물론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편지에 “한 장로교 선교사”라고만 나와 있었고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아마 여기에는 명예회손 문제가 야기되겠기에 페이 씨가 신중을 위하여 이름을 넣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런데 선친과 종조부 두 분께서 같은 학교 윌리스턴 세미너리에 다니셨기에 내가 학교 기록보관소에게 두 분의 모든 기록을 보내달라고 하여서 받았던, 종조부님 서류철에서 나온 종이 한 장에서 발견된 이름이었다. 그 사본과 번역문을 아래에 싣겠다. 이리하여 그 이름이 내가 찾고 있는 그 선교사라고 믿게 되었다.

  1910’s Jewhan Chung(1910년 정지환)

 

윗글은 이 카드의 제목이며, 이는 내가 윌리스턴 학교 기록실로부터 2014년 9월에 받았다. 여기에 한국 서울에 주소를 둔 “조지 에이취 존스” 박사가 연락인으로 나와 있으며 내가 의심하고 있는 횡령 선교사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

 


 

 

Slip of paper Jewhan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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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스캔 파일 카드
1910's Jewhan Chung decoded

한글 번역문
1910 정지환<

 

Ib. 송금건 관련자 삼인

  이 세 사람중 두 사람은 페이씨의 편지에서 발견한 두 사람이니 첫번 사람은 페이씨 자신이고, 또 한 사람은 편지에 나온 외국선교위원회의 회계담당자 드와이트 에이취 데이다. 제삼자는 조지 에이취 존스 박사로 종조부 정지환씨의 학교 서류철에서 나온 이름이다.

  Ibi.촬스 이디 페이

  그의 편지에 자기는 정지환씨의 지인이라고 소개하였고 자기의 월스트리트 사무실과 컨네티컷 스탬포드의 집에 방문하였다고 말하였다. 이 편지에 자기의 직업과 개인적인 정보가 없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본 결과 미국 지방자치제 연맹의 회원이고 스탬포드 사학회의 전기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페이씨가 정지환씨에게 그러한 도움을 주려고 그러한 오랜 세월동안 노력하였음에 대단히 감사한다. 그런데 그가 1956년 편지에 말하기를, 대략 25년 내지 30년전에 윌리스턴 세미너리의 학생이었던 정지환씨와 알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나의 계산으로는 종조부의 그곳 학생시절은 1906년에서 1910년까지였으니, 그 때는 적어도 46년전이었었다. 페이씨는 세월이 그렇게 빨리 간줄 깨닫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노력을 그치지 않았고. 정지환씨가 신경쇠약환자였다는 장로교 선교회측의 거짓 설명에도 불구하고 외국선교위원회와 장로교선교사는 법적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부당한 주장을 반박하여 결국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손해액을 보상하도록 하였다.

나 자신은 우리 진양정씨 가문의 종손으로서 선친과 종조부의 유일한 대리인이다. 그러기에 내가 노력하여서 이 고마운 분의 신상정보를 알아보고, 그의 자녀와 후손에게 나의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좀 더 추적해본 결과 두가지 사실을 발견하였다. 첫번째는 “메리 쎌레스트의 이야기”의 저자 “촬스 이디 페이”를 찾아내었고, 그가 전기작가임을 증명하게 되었다. 이 책의 초판이 1942년에 그리고 재판이 1988년에 출간되었다. 이는 19세기 후반에 있었던 논란이 많았던 미해결의 난파선 이야기다.

두번째는 그의 매장지를 발견하였다. 그곳은 플로리다, 팜비취, 레익 워스, 파인크레스트 묘지이며, 그의 편지주소 플로리다, 레익 워스, 12번 도로 남쪽, 1724번지와 근접한 거리이다. 그의 비석에는 생평연도: 1875년 출생, 1957년 사망. 그가 1956년에 편지를 쓰고 1년후에 사망하였다.
다음에 그의 연대표, “메리 씰레스트의 이야기” 겉장, 같은 책자내의 항해 그림, 그리고 묘비다.
연대표와 주소 설명:
1875: 촬스 이디 페이 출생. 1879: 종조부 정지환씨 출생. 1906-1910; 정지환씨가 윌리스턴 세미너리 수업시기이며 페이씨와 친교를 맺음.. 1916: 정지환씨 만성질환으로 사망. 1942: 메리 쎌레스트 초본 출간. 1956: 페이씨가 편지로 정지환씨 주소를 윌리스턴 세미너리에 문의. 1957: 페이씨가 플로리다 레익 워스에서 사망. 1985: 본인 정관호가 1985년 윌리스턴 아카데미에서 촬스 이디 페이씨 편지를 읽다. 1988: 메리 쎌레스트 재판 출간.
Address 1: 컨네티컷 스탬포드에 거주, 월 스트리트 사무실 운영 -1906 to 1910. Address 2: 컨네티컷 우드베리 그래씨 도로, 써니 크레스트 팜에 거주 (1942) Address 3: 플로리다 레익워스 북부 에이 가, 1027번지 (33460) - 1956. Address 4: 플로리다 레익워스 12번 가 남부 파인크레스트 묘지 - 1957~ .
 

페이씨와 종조부의 연대표
Timeline

페이씨와 정지환 종조부의 타자 연대표
Timeline of Fay

“메리 쎌레스트 이야기”의 겉장
The Story of Mary Celeste

메리 쎌레스트가 바다에서 유기(遺棄) 1872년 12월 4일
Mary Celeste 2

촬스 이디 페이씨의 묘비:
Charles Edey Fay tombstone

 

Ibii. 드와이트 에이취 데이

  외국선교위원회 재무담당자로서 결국 이 문제 해결의 중심인물이고 또한 종조부앞으로 손해금액에 상당한 수표를 쓴 인물이다. 구글 검색에서 많은 글을 발견하였는데, 주로 그의 근무내용, 국제 선교의 재검토, 세계 선교사 회의 등 많은 재료가 있었다. 이 모두 2015년 이후에 발간한 재료다.

  Ibiii. 조지 에이취 존스 박사(1867~1919년)

  존스 박사는 한국에서 일했던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였다. 그는 첫번째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로서 한국 종교의 학구적 연구를 하였다. 그는 1887년에 감리교 선교사로서 한국에 와서 한국의 기독교 전파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고, 세가지 학구적 신문을 설립하였다.
그는 또한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을 격려하여 이주 노동자가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도록 하였는데 1902년 십이월에 시작하였고, 1907년에는 그의 인천 교회로부터 반 이상이 하와이에 갔다.,
1907년에 그는 살해시도건에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예일 대학교의 “조지 트럼불 래드” 교수가 관련되었다. 내용인즉 존스가 한국인이 일으킨 독립운동을 억압한 일본경찰의 행위를 찬양한데서 일어났다. 그는 1919년에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사망하였다.

내가 수집한 재료를 종합연구한 바, 비록 완전한 증명은 할 도리가 없지만, 정지환씨의 학교 기록에 현재까지 보관된 서류철속에 정리용 카드에 그의 이름이 현재까지 100여년간 보관될 중요한 기록이다. 여기에 근거하여도 조지 에이취 존스 박사가 촬스 이디 페이씨의 편지에 서술된 정지환씨의 송금을 횡령했던 바로 그 장로교 선교사라고 증명할 수는 없지만, 전후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게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페이 씨 편지에 장로교 선교운영위원회에서 종조부가 한국에 있을 때부터 신경쇠약을 가졌다고 거짓 주장을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그 선교사가 자신의 횡령건을 부인하려고 조작한 말이지 어찌 장로교 선교회에서 종조부의 병력까지 알 수 있었겠는가?
이런 점을 생각하면 그 사람은 대단히 부정직하고 악랄한 인간이라고 나는 믿는다.
페이씨는 정지환씨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알았겠고, 오로지 존스 박사의 명예훼손을 피하기 위해서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뿐이라고 믿는다. 게다가 이름 높은 존스 박사는 강력한 일본에 아부하기 위해서 우리나라 독립투사를 무차별 살해했던 일본경찰을 찬양까지 하였음은 그가 종교인이지만 위선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와이에서 한국인 신도집회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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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선친의 미국주소: 뉴욕주 뉴욕시 서부 115번가 633번지

IIa.뉴욕한인교회


  선친의 모교 윌리스턴 세미너리 기록에 의하면 선친주소가 다음과 같았다.
633 West 115th St., N. Y. City. 뉴욕시 115번가 서부 633번지
1971년 내가 뉴욕시 브롱크스 병원에서 근무할 때 그 주소를 찾아갔더니,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뉴욕한인교회”였다. 목사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선친께서 자기가 “세들었던 방”이야기를 간혹 하신 걸 직접 들었다.
첫번째 이야기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박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느 해 이박사께서 그곳 작은 방에 들어오셔서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계셨는데 아마 3개월내지 6개월쯤 걸렸다고 들었다. 선친과 종조부께서는 두 분이 큰 방을 쓰셨다. 이박사는 중년이 되셨고, 선친은 십대 후반이었을 것이고, 나의 추정에 의하면 그 해가 1910년이었을 것이다. 이박사와 선친은 대단히 가까웠고 또 농담도 주고 받을 지경이었으며, 그때 선친은 이박사로부터 세례를 받으셨다.
두번째 이야기는 2010년에 한일합방의 비보를 들었을 때 선친과 종조부 두 분은 서로 얼싸안고 방에서 하루 종일 우셨다. 이제는 나라없는 백성이 되었기에. 내가 2015년 1월 6일에 그 교회의 이용보 목사님을 만났을 때 오래된 신도부책을 갖고 오셔서 선친 함자 “정재원”씨를 찾아 내었다. 너무나 반가운 일이었다. 단 한줄인데 거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있어서 내가 조금 교정을 하였다. 원본: “정재원”: 서울출신, N.Y.U.에서 상과전공 세례교인, 귀국.“
교정: ”N.Y.U. 상과전공”을 “펜실베니아 상과대학”으로, 세례교인난에 “이승만박사가 세례함”으로, “Jan 6, 2015 방문 오후 1:59분. 정관호 (막내아들)”을 추가하였다.
그런데 이 교회는 1921년에 다른 곳에서 시작하였지만 결국 1927년에 현 주소로 이사를 왔다. 선친은 이 건물에 분명히 1909년부터 1913년까지 계셨겠고, 아마 그보다 더 일찍 거주하셨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두번째 2015년 6월에 이용보목사님을 방문하여서 곧 현건물은 철거되고 재개발이 시작될 시점에 옛 모습을 보관하고자 4층까지 모두 올라가서 사진을 찍었다. 각층에 방에 세개 씩이고, 하나는 공동 화장실이었고, 내 생각으로 4층에서 선친-종조부와 이박사가 계시지 않았나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니 선친은 그곳이 후에 한인교회가 된것을 아셨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선친의 명단을 보니 많은 감회가 일어난다, 건물 1층이 교회인데, 교회안에 “강변에 앉아 울었노라: 뉴욕한인교회70년사”란 글이 있다. 그 당시 한인들이 오갈데도 없었겠고, 모여서 허드슨 강가에 앉아 울고 슬픔을 달랬다고 믿는다. 여기 나온 한줄의 선친소개는 선친이 직접 쓰신 건 물론 아니고 어떤 아는 분이 썼다고 생각된다. 아래에 사진과 신도부 명단을 싣는다. 다음에 사진을 싣는다.

 

뉴욕한인교회 원건물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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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 거실(선친거실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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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신도부의 선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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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a. 뉴욕한인교회에 관하여

  위키피디어를 통하여 다음의 정보를 얻었다. 1921년4월 28일에 한국 거주자와 학생들에 의하여 매디슨 애비뉴 감리교회에서 3.1운동을 기념하였기에 이 날을 교회설립일로 정하였고, 1927년에 현주소지로 이전하였다. 건물은 작은 4층이며, 크기는 ‘25피트X100피트’이며 한국독립운동과 강력한 유대를 가진 지식인의 교회였다.
선친은 틀림없이 1909년부터 1913년까지 이곳을 거주지로 정하고 사용하셨겠지만, 한방을 쓰셨던 종조부님은 같은 윌리스턴 세미너리에 1906년부터 1910년까지 수업을 하셨고, 두분이 항상 같은 숙소를 썼음을 감안할 때 아마 이 숙소 사용은 적어도 1906년부터 1913년까지 긴 세월동안 거주하셨던 두분의 오랜 숙소였다고 믿는다. 게다가 여기서 이승만박사가 선친을 세례하여 주셨으니, 이 교회가 나의 아버지 그리고 종조부와의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런데 이곳 뉴욕한인교회 70년사가 출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2021년 창립 백주년을 기하여 뉴욕한인교회 100년사가 크게 출간될 예정이기에 아버지의 이러한 인연을 생각하여 아버지 함자를 100년사 책에 넣어 달라고 이용보 목사님과 윤창희 변호사님에게 요청을 하였고, 지난 2016년 11월 28일 월요일에 윤변호사님을 직접 만나서 아버지에 관한 모든 정보와 서류 복사본을 드렸고 거듭 부탁하였다.

  IIb. 선친의 교육

  성명: 정재원, 鄭載謜, 영문 Jaone Chung
생평연도: 1893-1954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도 진주시
선친이 연소하셨을 때 조부님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셔서 우리 고향인 진주로부터 한양으로 이사하셔서 변화하는 세계에 관하여 배우시고 또 선친에게 좋은 현대교육을 마련하셨다.
그 당시 정규교육인 한문학외에 현대서양교육을 흥아학교에서 수업받으셨고, 미국유학준비차 동경에 위치한 청산외국어학원(靑山外國語學院)에서 영어교육을 일년간 받으시고, 다음해에 삼촌되셨던 정지환(鄭芝煥)씨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오셨다. 그때 김규식박사께서 대동하셨고, 또 뉴욕시에서 학교에 입학할 준비도 미리하였다고 들었는데, 그 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첬는데 영어과목에서 낙제를 하셔서 다시 3개월간 준비하시고 재시험에 합격하셨다.
이 이야기는 선친으로부터 내가 몇 차례 들었다. 내가 어릴적이었기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윌리스턴 학교를 두번째 방문할 때부터 선친의 전학교 즉 초등학교에 관해서 알려고 문의해보아도 그곳 기록에는 전학교가 나와있지 않다고만 하였고, 현재까지 알지 못한 상태이다. 물론 나는 국내에서 학교 다닐때, 특히 선친 재세 시에 내가 미국에 간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고, 선친도 내가 미국에 갈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고 믿는다. 지금같으면 당연히 선친의 학교 이름과 수업연도를 모두 잘 받아놓았을텐데 많이 아쉽다.
여기에 쓴 선친의 귀국연도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게 제일차세계대전의 연도였으니 1914년이 확고한 정보다. 그런데 미국 도착연도는 내가 추정하였다. 선친께서 대략 10여년간 공부를 하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라이트 형제의 초기 비행은 선친이 미국에 오신 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셨다. 그 초기비행시기는 1903년 12월 17일이었으니, 아마 선친은 1903년 여름이나 가을에 도미하셨다고 믿는다. 내가 찾을 수 있는 학교기록은 윌리스턴 세미너리 1909~1913년, 워튼 스쿨 1913~1914년이 전부다. 그럼 1903년 아니면 1904년부터 1909년까지 5년간 어디서 초등교육을 받으셨는지 알 수 없어서 많이 답답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윌리스턴 세미너리와 워튼 스쿨에서 선친의 기록이 잘 보존되었기에 이나마 찾은 것이 다행이다. 아래에는 아버지의 학교교육을 증명하는 유일한 사진이며 옛 학교건물은 새 건물로 완전히 대치되었지만 다행히 이 정문은 보존되어 그곳 도서관의 정문이 되어서 여기에 이 1913년 사진, 1985년 본인과 아들 헨리의 사진, 그리고 2014년 100주년 기념을 우리가 하고 마지막에 이곳에 와서 본인, 아들 헨리와 제임스, 그리고 손자 카너 이렇게 삼대가 또 그 정문앞에서 찍은 사진을 올린다.

 


 

 

선친의 미국교육의 유일한 증빙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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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햄튼 시도서관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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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 사진 백주년 기념. 2013년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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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정씨 종파 오대 가계 도표
CHUNG CLAN 1

가계 도표의 타자 설명
Chung's pedigree type 1

 

이 도표에서 상부는 증조부님, 다음은 조부님과 종조부님(정지환), 다음은 부친 정재원이시고, 다음은 본인 정관호이고 맨 아래에는 정원경(Henry)와 정원희(James)이다. 여기서 적색 하선은 미국에서 1903년부터 1914년까지 교육을 받으신 종조부와 부친을 표시한다.

 

Belvedere Castle
Belvedere Castle | Central Park Conservancy 43 Bekvedere Near View Belvedere Castle - Central Park Tours

 

III. 선친의 사진 촬영장소 찾기
  나는 선친의 옛 사진 넉장을 갖고 있는데, 그 중 두장은 돌담 앞에서 그리고 나머지 두장은 공원 벤치에 앉아서 찍으신 사진이다.
첫 두장은 보관상태가 불량해서 배경의 세부를 보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인물, 돌담, 울타리, 그리고 하행계단도 볼 수 있었다. 혹시 희미한 배경이 허드슨 강이 아닌가하고 의심한 적도 하였다.
2015년 1월 6일에 나는 뉴욕 사학회에 2차로 갔더니, 그곳 상담가가 곧 알아내어서, 그곳에서 비교적 가깝게 위치한 벨베디어 성(Belvedere Castle)이라고 하여서, 나는 아침 눈을 무릅쓰고 걸어서 방문객 안내소에 갔다.
그곳 직원은 돌담 사진의 위치를 알아보고, 또 한 직원을 불러서 우리 셋이서 앞뜰로 나가서 원직원은 돌담앞에 내가 설 곳을 지시했고, 둘째 직원은 사진 두 장을 찍었다. 나는 그들에게 감사하였고, 눈이 워낙 많이 내려서 벤취 장소는 추후에 방문하기로하고 돌아왔다.
2015년 6월 6일 나는 이 성을 재방문하였고, 두번째 사진 두 장이 찍혔던 벤치의 장소를 찾으려고 하였는데, 선친이 친구 두분과 번갈아 앉아서 찍으셨다. 겨울외투를 입으셨으니 아마 겨울이었던 모양이다. 이 사진 배경은 비교적 잘 나타나서 성곽과 탑, 거기서 시작한 긴 돌담이 우측으로 나아가서 화면이 끝날때까지 계속되었고, 벤치뒤에 조각한 기둥 일부가 보였고, 또 전면에 곧은 보행로가 있어서, 어렵지 않게 보행로를 찾았고, 성으로부터 예상된 거리를 보행로 우측에서 찾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성과 보행로는 틀림없는데, 사진 우측에 있던 상행 경사지, 긴 돌담, 벤치, 그리고 기둥이 전혀 없을뿐 아니라 우측은 일종의 동산이었는데, 현재는 우측에 지면이 내려앉고 큼직한 못이 있었다. 게다가 보행로 양편에 있는 나무가 대단히 무성하였고 그 잎에 가려져서 내가 섰던 지역에서 성 건물이 거의 다 보이지 않았기에 성 아래에 접근하여 사진찍었다. 오랫동안 머물 시간이 없어서 다음을 기약하고 소득없이 떠났다. 그래서 다음 방문 시기에는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에 오고, 또 그 안내소에 가서 문의할 계획을 세웠다.
우리 가족 모두 이번 추수감사절에 롱 아일랜드 사우댐턴(Southampton, New York)에 있는 둘째 아들 집에서 며칠 지나다가 맨해튼 아파트로 옮겨와서 2016년 11월 28일 월요일에 이 성을 다시 방문하였는데 계획대로 전에 갔던 안내소에 가서 이번 두장 사진을 보였더니, 안내원은 역시 많은 흥미를 보였고, 사진 우측의 변화는 1937년경에 Turtle Pond 즉 거북 못을 만들기 위해 언덕과 돌담 등을 발굴하였기에 모두 없어졌다고 내게 설명하였다.
사진 장소를 내게 알려줄 수 있겠느냐는 문의에 선선히 응락하여 우리는 함께 하행로로 내려가서 성 건물을 우측으로 돌아서 그 보행로 까지 간 후 적절한 위치를 지적하며, 그곳이 사진 장소라고 내게 알려준 후 안내원은 떠났다.
그래서 나는 그가 지적했던 지점에 선친이 앉으셨다는 상상을 하며 몇 걸음 후퇴하여 그 장소, 성 건물, 보행로를 옛 사진에 넣었던 것과 같이 적절한 거리와 각도를 사용하여 인물이 없는 빈 공간 사진을 찍었고, 다음에 보행자에게 청하여 그가 나를 바로 그 자리에 넣은 사진도 한 장 찍었다.
그 다음 사라진 우측 장면을 좀 더 강조하려고 ‘빈 공간’ 사진에서 조금씩 우회전하며 사진 석장을 찍어서 마지막 사진에는 거북 연못이 잘 나오게 하였다.
그리고 그 안내자가 갖고 온 공원 지도에 우리가 보았던 표지물을 보여주기 위하여 볼펜으로 큰 사각형을 그렸고, 그 성을 표시하는 작은 사각형을 원으로 그렸고, 다음 벤치 자리에 “V”자를 뒤집어서 ‘체크’하였는데, 귀가 후에 내가 이 그림을 스캔하여 여기 마지막 사진으로 실었다. 내가 오랫동안 찾았던 그 두 장소를 찾고 또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사진도 찍었기에 너무나 만족하였다.
여기서 내가 그 자리에 서서 사진을 찍을 때 아버지가 옆에 계신 듯한 생각이 들었다. 1925년 겨울에 찍으셨고, 나는 2016년 겨울에 찾아왔으니 만 96년만에 찾은 셈이다. 전에도 나의 상황을 이야기하였지만, 내가 고1때 만16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내게 미국유학이야기를 자상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고, 나는 친척이나 손님이 오셨을 때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서 그 당시 회고담 하시는 걸 조금 들었던 기억이 나의 지식의 전체이고, 나머지 내용 전체는 어머니로부터 들었을 뿐이다. 어머니는 한문에 유식하시지만 신교육을 받지 못하셨기에 나에게 알려 주시는 데 한계가 있었다.
나는 아버지 생전에 내가 미국에 온다는 생각, 미국에서 교육을 받는 다는 생각, 미국에서 시민권을 얻어 영주한다는 생각, 게다가 아버지 학교를 찾는 다는 생각은 전혀 해 본적이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내가 아버지께 차근차근 구체적으로 여쭈어 보았겠는데 하긴 아직도 미진한 점이 있지만,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이는 영구히 미상의문으로 남을 것이다.
하여간 이 넉장 사진의 촬영장소 즉 바로 그 자리를 찾았고, 또 내가 바로, 선친이 서서, 그리고 앉아서 찍으신 그 장소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에 대단히 만족한다.
이 성은 뉴욕시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 안에 있으면, 79번가에 있는데, 인기있는 곳이기에 많은 관광객 특히 외국인, 유럽인들이 북적거린다. 내가 길을 잃어서 물어보면 대다수가 손을 흔들면서 자기도 처음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 글을 읽고 또 뉴욕시에서 관광하는 분들에게 이 성곽방문을 추천하고 그 때 정관호가 찾았던 곳도 한 번 들렸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끝마친다.

 

Two photos in front of stone wall: Left father alone, right father and his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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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 photos at the same site: Left a vacant space, right Kwan Ho Chung replac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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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 photos in front of the stone 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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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her with Dr. Hee Gyung Lee on a be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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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her with another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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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나의 최대의 계획은 1925년(교정 1923년) 사진에 나왔던 아버지와 친구분들이 벤치에 앉으셨던 그 장소찾기였다. 그 사진 두 장은 성곽의 주건물과 탑, 건물로부터 연결된 언덕위에 앉은 돌담, 큰 기둥과 보행로등을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현재 긴 돌담, 언덕, 기둥, 그리고 벤치는 모두 없어졌고, 그 대신 그 위치에 “자라의 못”과 나무가 빽빽한 숲으로 방문객의 진입을 불허하는 저지선이 보행로 북편에 설치되었다. 그 기념품점의 여종업원은 본건물을 남행하고 동행하여 보행로를 따라 나를 그 지점까지 30 야드 가까이 안내한 후 바로 벤치가 있었다고 믿는 지점을 내게 지적하였고, 게다가 “센트럴 파크”의 공식지도를 꺼내어 걸어온 길을 선으로 그리고 마지막에 까만 삼각형을 찍어서 표시한 후 내게 주었다. 이게 바로 내가 몇 달 수고를 한 결과였으니, 당연이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깎듯이 하였다. 결국 나는 그 자리를 모두 찾았다! 여기에 구글 지도에서 한 장, 그리고 그 직원이 준 “센트럴 파크 지도”에서 한 장, 이렇게 두 개의 이미지를 넣는다. 또 바로 그 지점에 내가 서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이것도 싣는다.

 

Vacant Pedestrian w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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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사진에 나왔던 벤치의 위치라고 추정한 곳에 촛점을 맞추고 성곽을 향하여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이다. 그런데 여기서 옛 사진과 비교해보니 성곽에 너무 가깝고 또 벤치와 사진사는 모두 우측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니 그 둘이 돌담 앞 사진처럼 똑같을 수는 없다.

 

KHChung trying to stand as close as possible to the bench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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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tle Map 1: From Google Maps
Belvedere Map 1

 

중앙흑색 점을 가진 적색 물방울은 벨베디어 성곽이며, 자라 못은 동북부에 위치하였고, 그 아래에 79번가 횡단로가 있다. 거의 평행인 횡단로위에 작은 도로는 아버지, 친구분들, 그리고 현재 나 자신이 통과한 보행로이다.

 

Map 2 센트럴 파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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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펜으로 그린 직사각형에서 우측 수직선에 아래의 적색 점은 “벨베디어 성곽”을, 그리고 그 위에 흑색 삼각형은 벤치의 자리와 나의 현재 위치를 가리킨다.

 

Map 3 파크 지도중 성곽과 선친의 사진 위치를 명시한 지도
Belvedere and Photo site

 

이 확대 지도는 하단에 가까운 79th Street Transverse를 자세히 보여주며, 또 그 위에 평행으로 가는 보행로는 “Belvedere Castle”이란 글자가 부분적으로 가렸다. 그 중간쯤 되는 지점에 검은 적색 점은 Castle을 표시하고 거기서 조금 우측에 있는 내가 그린 같은 색의 삼각형이 바로 내가 찾았던 선친과 친구분들이 앉았던 벤치의 위치다. 이 위치는 관광안내소 직원이 짚어 준 바로 그 점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벤치, 아버지와 친구분들, 그리고 내가 “KHChung with pedestrians”란 제목으로 찍었다. 그 세분이 앉으셨던 벤치(즉 의자)는 없어졌고, 그 대신 긴 철제 말뚝과 철선을 설치하여 관광객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나 역시 철선밖에 서서 사진을 찍혔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나의 성취한 결과다.

후기

 

이 추적의 나의 동기는 첫째 사진의 정확한 장소를 발견하는데 있었는데 직원의 도움으로 가능하여서 거기에 내가 서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현재 사진을 90여년전 사진과 비교해보니, 첫번 두 장 사진의 돌담은 변하지 않았으나, 거기에 지붕, 기둥 그리고 전망대같은 추가 건축이 있었다.
그러나 두번째 사진 두장에서 나왔던 우측 표시물은 언덕, 돌담, 기둥 그리고 벤치등 거의 모두 없어졌고, 아직 남아있는 품목은 성과 탑, 직선 보행로뿐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 다시 와서 나의 소망을 이룰 수 있음에 기뻤다. 명랑한 기분으로 떠나면서 고대 한시 마지막 구절을 읊었다. “幸甚至哉, 歌以詠志(행신지재여, 가이영지로다)”, 즉 이곳에 왔음이 큰 행운이니, 나의 기쁨을 노래하리로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삼국지의 조조 노래다.

 

Kwan Ho Chung – February 1, 2017

 

 


 

 

 

제2부: 선친의 미국 발자취 후기(後記)

 


 

 

이 글은 시작한 2014년 8월 붙어 만 4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재료를 갖고 그 후 많은 노력을 기우리는 동안 많은 재료를 추가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그 발자취를 정리해본다.

I. 아버지 유학시절의 연도, 학교 그리고 숙소

우선 내가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자세한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단편적이며 지극히 적은 (소량의) 일화성 이야기,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아버지 학교 즉 Williston Seminary, University of Pennsylvania의 동창회와 Archives, 또 아버지의 숙소 633 West 115th Street, New York City에서 발견한 자료 등등에 근거하여, 또 학교 기록에서 발견한 기록 역시 근거로 하여 내가 아버지의 유학을 재 조명하고자 한다.
첫번째 문제는 아버지 유학연도였다. 어머니로부터 듣기는 10년 유학이라고 여러차례 들었다. 그러니 어느 해부터 어느 해까지 유학을 하셨는가를 확인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귀국연도는 틀림없이 1914년이었다. 왜냐하면 일시 귀국을 하셔서 조부님과 송금건을 상의하시려고 오셨다가 뜻밖에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민간 해상활동이 세계적으로 중지되었기에 귀교하실 수 없었고, 또 이 전무후무했던 세계대전이 얼마나 오래 갈지 알 수 없었기에 귀교를 포기하시고 결국 가정관리를 하시게 되었다.
그러면 아버지가 미국에 도착하셨던 연도는 언제였는가? 10년 유학이라하였으니, 아마 1904년이 아닐까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자료가 있다. 내가 중학교시절 미국에서 세계최초의 비횅을 한 라이트 형제의 이야기다. 그때 아버지가 들으시고 내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라이트 형제의 처음 비행이 있었다.”고 하셨다. 그럼 그 연도를 찾아보니, 이는 “December 17, 1903 by Orville and Wilbur Wright from Wikipedia” 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1903년 중에 아마 미국에 오셨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를 동행한 분이 두 분 계셨다. 한분은 아버지의 숙부 鄭芝煥((1879~1916) 씨였고, 또 한분은 유명한 독립투사이며 민족의 지도자였던 우사 김규식(尤史金奎植, 1881년 2월 28일 ~ 1950년 12월 10일)박사였는데, 아마 김박사께서 아버지 다니실 학교를 찾아서 아버지가 입학시험을 보시도록 하셨다고 나는 믿는다.
아버지 말씀이 입학시험에 영어에서 낙방하셔서, 그 학교에서는 6개월간의 재준비기간을 부여하여 그때부터 마을도서관에서 쉴 새 없이 공부를 하셔서 재입학시험에 합격을 하셔서 그 학교에 다니게 되셨다.
나는 아버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기록을 모두 찾아냈지만, 전학교 즉 Elementary School을 찾을 수 없었다. 내 생각으로는 어느 사립소학교 즉 Private Grammar School일거라고 믿으며, 그 소학교 입학연도가 아마 1904년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그 후 1909년에 Williston Seminary에 입학하셨는데, 이는 Elementary School의 9학년에 해당되는 과정이다. 그러니 1904년부터 1908년까지 4학년부터 8학년까지 그 사립소학교를 다니셨다고 믿게 되었다.

그럼 미국에 오시기 전에 어떤 교육과 준비를 하셨고 어떻게 태평양을 건너 오셨는가하고 내가 들었던 재료와 나의 추리를 통하여 그 당시 상황을 구성해 보려고 한다.
아버지는 1893년에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셨고, 조부님은 진사급제하시고 경북 예안군 현감(원님)으로 가셨다. 그후 한일합방이 임박하여질 때 현감자리를 사직하시고 한양으로 이사오셨고, 그 후 많은 신지식인과 교류를 하셨고, 결국 아버지가 어리셨을 적 신학문을 가르치던 흥아학교란 곳에 입학하셔서 아마 2, 3년간쯤 공부를 하셨다.
그 후 1년간 동경 청산외국어학원에서 외래학생으로 영어공부를 하셨고, 그곳에 살았던 미국인집에서 숙식을 하셨으며 그 집 아이들과 사귀었다. 그러니 내가 추정하건대 그 때가 바로 1902년부터 1903년까지였다고 믿는다. 그 다음 1903년 여름에 Transpacific passenger liner(태평양횡단 정기여객선)로 일본에서 San Francisco로 항해하셨는데, 시일이 30일 걸렸고, 두 분 즉 정지환 종조부님과 김규식박사가 동행하셨다. 그 후 San Francisco에서 New York 시까지 Transcontinental railroad(대륙횡단철도)로 기차를 타고 오셨다고 믿는다.

아버지 숙소는 내가 어렸을 적에 듣기로 어떤 여관집같은 곳으로 생각하였는데, 1969년경에 내가 Williston Seminary와 연락을 한 후 아버지의 뉴욕 주소를 받게 되었고, 그 후 Bronx, New York에서 근무하고 또 거기서 거주할 때 1971년경에 실제로 그 주소를 찾아서 확인 한 결과 한인교회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조회 1: 뉴욕 주소]
언제부터 그곳에 계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1913년까지 즉 Williston Seminary를 떠나실 때까지 그곳에 계셨던 건 틀림없었겠고, 함께 계셨던 지환 종조부께서 1910년에 Colorado School of Mines에 가실 때까지 함께 계셨고 또 이곳에서 1910년에 이승만 박사와 옆 방에 계셨다.
나의 추정으로는 1904년에 사립학교에 4학년으로 입학하셨고 1909년에 Williston Seminary에 9학년으로 가실 때까지 그 학교에서 5년간 교육받으셨겠다.
나는 아버지의 대학교 University of Pennsylvania를 1969년, 고등학교인 옛 Williston Seminary 현재 Williston Northampton School을 1979년, 1985년, 2013년, 2014년 이렇게 4번 방문하였고, 아버지의 숙소 633 West 115th Street, New York City를 1971년, 2014년, 2015년에 두 번, 2016년, 2017년 이렇게 다섯번 방문, 그리고 마지막 알려진 아버지가 두 친구분과 함께 장소인 Belvedere Castle, Central Park, New York을 2015년 1월, 그리고 그 후 대 여섯 번 찾아서, 1923년 제2차 미국방문시 아버지께서 사진을 찍으셨던 두 장소, Stone wall 앞, 그리고 Pedestrian Walk가의 벤취 위치를 찾아서 그 계절에 맞게 사진을 찍느라고 이렇게 여러차례 찾았다. 이게 나의 추적 방문이었다.
거듭 애석한 것은 아버지의 사립소학교를 찾아보려고 New York Historical Society를 여러 차례가서 그 옛날 학교를 찾아보아도 오로지 공립학교만 나와있었기에 불가능하였다.

이 후에 아버지 마지막 숙소의 주소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연감 즉 Yearbook of 1913-1914에서 찾았다. 하지만 그건 최근이었기에 내가 직집 가 볼 수는 없었고, on-line maps에서 찾아 보았다. 그 주소는3911 Pine Street, Philadelphia, PA [조회 2. 두번째 주소]이었다.
이것이 아버지 유학시절의 연도였고, 또 주소였다.

II. 교육비와 생활비의 조달 문제

아버지는 가문의 재산을 사용하여 미국 유학을 하셨는데, 워낙 연소하셨기때문에 셋째 숙부님 지환씨가 동행하고 함께 사셨으며, 물론 그분께서 송금을 받으셔서 아버지 학비와 두 분의 장기간 생활비로 쓰시기로 되어있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첫째 그 당시 한국에서 미국으로 송금하기가 대단히 힘들어서, 한국에 파견된 미국 선교사 한 사람에게 부탁하여 송금하셨는데, 그 돈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고, 들어가도 많은 시일을 요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송금이 안 된 적도 있었다. 아버진은 세월이 갈 수록 송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셨기에, 어느 해에는 학교에서 휴학까지 하셨던 때가 있었고, 식사도 할 수 없어서 동네 아이스크림 가개(Ice cream parlor)에서 간단한 것으로 요기만 하셨던 때도 있었다. 자기의 수양어머니가 아버지보고 와서 함께 식사하자고 하여도 폐를 끼칠게 염려되어서 사양하셨다. 또 겨울에는 그 동네 눈을 치고서 돈을 조금씩 벌기도 하셨다. 내가 Williston Seminary 기록에서 찾은 바 1911년부터 1912년까지 11학년을 휴학하셨다고 되어 있으며, 그 다음해 1912년부터 1913년까지 11학년을 마치셨다고 되어 있다.

 

Exhibit 1 Williston Seminary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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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2 Wharton School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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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후 12학년은 마치지 않으시고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 입학하셔서 1913년부터 1914년까지 Freshman course를 완료하셨고, 송금문제를 의론하고자 1914년에 일시 귀국하셨다가 세계제1차대전의 발발로 귀교하지 못하셨고, 대학교육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또 한가지 발견된 사실은 종조부 정지환씨께서는 초등학교교육을 어떻게 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Williston Seminary기록에 의하면 1906년에 입학하시고 1910년에 졸업하시고 그해에 Golden, Colorado에 위치한 School of Colorado Mines(콜로라도 광산대학)에 입학하셔서 1914년에 졸업하고 귀국하셨다고 되어있다. 내가 그 분 기록을 찾으려고 몇 번 시도하였지만, 그 School of Colorado Mines는 그 당시 Yearbook조차 갖지 않았고 기록이 아주 부실한 듯하여 이를 증명할 수 없었다.
내가 1985년에 윌리스턴 동창회 사무실에 방문 때 직원으로부터 받은 서신의 복사본이다. [ 참조: Mr. Charles Edey Fay’s letter ]

이 내용은 촬스 이디 페이씨라고 하는 분이 정지환씨 나의 종조부를 위하여 장로교 본부와 교신한 내용이다. 이 내용에 한국에 파견되었던 미국선교사 한사람이 송금액을 횡령하여 지환씨가 대단한 곤란을 겪었음을 페이씨에게 호소하였는데, 페이씨는 장로교 위원회에 호소하였고, 위원회는 처음에 부인하다가 나중에는 인정하고 보상금을 지불하려고 페이씨에게 수표를 보냈지만 이는 너무 오랜 세월이 되어서 지환씨와 연락은 불가능하여서 Williston Seminary에 문의하였다고 되어있다.
어머니 말씀에는 한국주재 미국선교사라고만 하셨고, 물른 그의 이름은 모르셨겠다. 또 Mr. Fay의 편지에 “a Presbyterian missionary”라고만 하였지 그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학교 기록실로부터 받은 정지환씨 재료중 한 쪽지 원본의 복사에서 지환씨의 연락인의 성명과 주소를 발견하였다. 성명은 Dr. George H. Jones, Seoul, Korea로 나와 있었다. [정지환씨의 기록에서 참조 Dr. George H. Jones]
내가 그에 관해서 많이 검색을 하여보니, 옛날 한국에서 아주 여러해 선교사업을 하였던 이국인선교사로 유명한 분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사건을 나 혼자서 생각과 추리를 하고 다음과 같이 잠정 결론을 내렸다.
나는 상기의 재료를 근거로 아버지 경비로 보낸 금액을 송금과정에서 횡령하였던 한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는 다른 사람이 아닌 “Dr. George H. Jones” 였다고 믿는다.
“Dr. George H. Jones”가 정지환씨에게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그에 관한 정보가 지환씨 학교기록에 지금까지100여년간 보존되었겠는가?
바로 그 분이 두 분의 재정적 생명선인 송금을 담당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 그 송금 횡령자는 당연히 Dr. George H. Jones라고 믿게 되었다.

III. 종조부 정지환씨의 역할

그런데 또 다른 한가지 문제가 대두되었다. 아버지와 정지환씨의 가족관계였다.
할아버지는 진양정씨 은열공파에서 11대종손이셨고, 아버지는 12대 종손이셨고, 나는 13대 종손이다.
그러니 그 당시 만석의 재산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모두 상속이 되었고, 할아버지께서는 당시 가장 좋은 교육을 받을 곳이 미국이라고 믿게 되어서 지인 김규식박사와 자기 셋째 동생 정지환씨에게 동행하도록 하셨고, 지환씨는 큰집 조카인 아버지의 후견인으로 함께 도미하셔서 아버지의 학업을 맡아서 관리하시도록 하였다.

아버지 생년은 1893년이고 지환씨는 생년이 1879년이었으니, 교육시작은 아마 1904년으로 믿어서 아버지가 11세였고, 같은 해 지환씨는 25세쯤 되셨겠다. 당연히 지환씨가 아버지 교육과 두 분의 생활을 담당하시는게 타당하였음에 아무 이론이 없다. 그런데 한가지 예기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였다. 지환씨는 방금 결혼을 하였다가 부인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만리 타국에 오셔서 10여세 된 조카의 교육, 훈육 기타 온갖 돌보는 책임을 지게 되셨는데, 자신은 25세로 인생에서 가장 왕성한 시기이었겠으니, 어찌 어린 조카 하나만 돌보며 천금같은 세월을 낭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정지환 종조부께서도 스스로 자신의 학업을 받도록 알아 보신 후, 얼마 안되어 뉴욕시에 있는 어떤 초등학교에 가서 외국인 성인으로서 받아야할 최소한의 교육을 받으셨겠고, 다음 단계에 흥미롭게도 1906년에 아버지가 추후에 다니셨던 Williston Seminary에 9학년으로 입학하셨고, 아버지는 1909년에 또한 입학하셨다. 그 후 종조부께서는 1910년 즉 4년만에 졸업하시고 Golden, Colorado에 있는 광산대학 즉 School of Colorado Mines에 입학하신 후 1914년에 무난히 졸업을 하셨고 또 귀국하여서 광산업에 종사하신지 얼마 안되어서 불행히도 지병으로 1916년에 타계하셨다.

맣할것도 없이 지환씨의 학비와 생활비는 조부님이 아버지 교육과 두 분의 생활비에 쓸 경비를 보내신 돈에서 사용하였다. 조부님이 자기 아드님께 쓰시라고 한 모든 송금액에서 지환씨는 모든 돈을 관리했던 상황이었기에, 내 추측으로는 조부님의 허락같은건 없이 자기 스스로 자신의 학비와 생활비를 송금액에서 썼겠고, 또한 아래에 명시하겠지만, 자신의 생활비와 교육비를 우선적으로 처리하고 아버지의 경비는 다음으로 미루었다는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두 분의 교육연도를 한번 살펴보겠다.
아버지
초등학교; 1904~1909, 고등학교; 1909~1913(1년휴학), 대학교1913~1914

종조부
초등학교; 1904(?)~1906, 고등학교; 1906~1910, 대학교; 1910~1914

이상의 연도를 정리해보면, 아버지는 고등학교시절 학비가 조달되지 않아서 1911~1912년 즉 고등학교 3학년을 휴학까지 하셨고, 4년제 고등학교를 졸업을 못 하시고 3년에 끝마치고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 시험을 쳐서 입학하셨다.

그런데 종조부는 초등학교교육은 어떻던지 고등학교 4년과 대학교 4년을 아무 지장없이 멀쩡하게 졸업까지 하셨다.
그 송금과 비용은 원래 아버지의 교육에 필요했던 자원이었는데, 종조부가 자기도 곁들여서 공부를 하겠다고 결정하고 두 분이 함께 교육을 받으셨는데, 결과적으로 자금이 부족하여서 아버지는 휴학까지 하셨고, 종조부는 아무 지장없이 고등학교 4년제, 대학 4년제를 마쳤다.
그리고 송금과 기타 돈은 종조부가 관리하였으니, 자신의 학비는 우선적으로 하였고, 아버지 학비는 없어서 못하셨다. 여기에 이런 문제를 제기하지않을 수 없다.
아버지 학비를 뒤로 미루고 자신의 학비로 사용했음이 밝혀졌기에 나는 여기에 심각한 의심을 제기하는바이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따질 필요도없이 두 분의 교육기록이 모두 생생히 증명하니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종조부가 올바르지 못한 인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 정도 인격의 소유자라면 어찌 교육비만 자신을 위하여 남용하였겠는가? 아마 자신의 교육비외에도 더 많은 돈을 착복하였다고 나는 굳게 의심한다.

다시 말하자면 천금같은 귀한 송금액을 외부로는 “Dr. George H.Jones” 에게 횡령을 당했고, 내부로는 정지환 종조부로부터 거금을 착복당하였다!
이러한 결론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또 한가지 일화를 소개하겠다. 내가 첫번 귀국하여 나의 큰 당숙 재영아저씨를 뵈었을 때 그 분께서 하도 반가워서 나에게 지난 이야기를 끝도 없이 하셨다. 거기에 지환종조부 이야기가 나왔다.
지환씨가 교육을 받은 후 귀국하여 자신의 상속금액을 갖고 조부님과 많이 논쟁을 하였고 여의치 않으니까 자신의 둘째 형님께 하소연을 하니, 둘째 형님은 지환동생을 달래며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모두 하늘에서 받은 복대로 사는 법이다. 큰 형님은 종손이시기에 전 재산을 물려 받았고, 나나 너는 지손이기에 거기에 합당한 돈을 받았으니 이 모두 당연한 일이며 우리나라에 고대부터 내려 온 법이니라. 그러니 너는 네 몫을 받은 대로 불평없이 사는게 온당한 도리다.” 이말씀에 지환씨는 불끈하여서 데꾸하기를, “아따, 형님이 어찌 나를 이해한단 말씀이요? 나는 태평양 고래요, 당신은 우물안 개구리요. 영 말이 통하지 않소.”히였다고 들었다. 그러니 지환씨가 모든 걸 자신 위주로 하였던 인물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에 참고로 Williston Seminary의 학급제에 관한 용어를 설명하겠다.

First year (1909-1910): Junior Class
Second year (1910-1911): Junior Middle Class
Third year (1911-1912): Middle Class, which was skipped for a year)
Therefore father returned next year and finished this class 1912-1913.
Fourth year supposedly to be 1913-1914: Senior Class. He never returned here.
Instead he went to the Wharton School and finished the freshman course there.
여기에 족보에서 증조부, 조부님들의 생평연도를 기록하였다.

증조 할아버지 동윤(東允): 1836, 9, 29 – 1898, 2, 21
할아버지는 네 형제분이셨고 다음에 함잠를 올린다.

첫쩨 할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셨고 장자이며 11대 종손이셨다.
상환(祥煥)1875,1, 8. - 1940, 1. 26.
둘째 할아버지: 표환(杓煥) 1877, 5, 23 – 1945, 3, 23
셋째 할아버지: 봉환(鳳煥) 1878, 7, 16 – 1897, 7, 13
넷째 할아버지: 지환(芝煥) 1879, 8, 16 – 1916, 7, 24

IV. 미국유학 10년에 최종 교육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1년 수료하셨다.

 

Exhibit 2 Wharton School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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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미국에서 10년 유학을 하셨고, 마지막 해에 펜실대학교 일학년과정을 끝마치시고, 송금문제를 조부님과 직접 해결하시려고 일시 귀국하셨는데, 예기치 못하게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민간여객선은 끊어졌고 언제 다시 재개할런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대학교육은 중단되었고, 아버지는 가사를 책임지시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일학년 대학교육하신 걸로 만족하실 수 있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끝내지 못하시고 또 계속 하실 기약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결국 아버지의 학력은 유감스럽게도 대학교 1학년 수료로 끝났다.
이 모든 정보에 의거하여 아버지 유학과 그 당시에 겪으셨던 고생과 결과에 관하여 나는 여러가지로 생각해보고 자신의 의견을 여기에 올린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이미 받은 학업에 추가로 일본에 가셔서 나머지 교육을 받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 일류대학에 가셔서 다시 입학을 하시고 4년제 상과대학을 끝마치시든지, 아니면 미국에서 교육받으신 학력 특히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즉 워튼 스쿨) 교육을 인정받으셔서 일본대학에 2학년으로 편입하실 수도 있었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미국교육 바탕에 최신 일본교육을 추가하여 대단히 훌륭한 학력을 가지신 분이 되셨겠다. 그 명망이 높은 Wharton School에서 Freshman course를 마치셨으니, 동경제국대학이나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같은 곳에서 경제학을 수학하시고 졸업하셔서 경제학자의 길로 나가셨다면 가문에도 영광이요, 후손에게도 자랑할 일이었겠다.
그런데 아버지는 교육은 중도에 끝을 맺으시고 가정의 재산관리를 담당하시고 다음에는 중국으로 개인무역을 하시다가 십여차례 실패를 하신 후 가산은 탕진하게 되었고, 내가 출생한 직후 적선동 집까지 팔고 셋방으로 가게 되었고 내가 자라서 미국에 올 때까지 가난은 계속되었다. 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리오?

V. 아버지 미국교육으로부터 받았던 가족유산

그렇다면 그 옛날 아버지의 10년간 미국유학은 나에게, 나의 아들에게, 그리고 우리 후손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던 일이었던가?
받드시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다. 그건 내가 아버지의 경험을 어떻게 받아드리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라고 믿는다.

내가 처음에 미국에 올 때 나는 미국교육에 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내가 갈 수없는 미국에 그 교육에 관해서 문의할 필요조차도 없었을 뿐 더러, 아버지의 족적에 관한 질문조차도 한 적이 없을 지경이었다.
하긴 우리가 부산서 피란생활을 할 때 가끔 아버지 지인을 통하여 젊은 이들이 찾아와서 특히 미국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교정할 것이 있으면 도와달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 그들이 아버지께 미국 대학에 관하여 문의한 것 몇 가지가 기억에 남았다. 아버지는 예를 들어 설명하여 주셨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좋은 대학이 대도시에만 있는 게 아니고 먼 시골에도 많이 있다고 하시면서 예컨대 Yale 대학이야기를 하셨다.
한번은 작은 당숙께서 Harvard는 어떤 학교입니까? 하니 아버지 왈, “Harvard에 관한 이런 이야기가 있지. Harvard 가 있는 곳은 Cambridge라고하는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Harvard대학 총장을 말할 때에는 President라고 부르지. 하긴 President라면 미국대통령이란 호칭이 아닌가? 그런데 외부인이 가서 그곳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이 계속 President라고 부르니 외부인은 혼돈이 되어서 그들에게 “혹시 당신이 말하는 President는 미국 대통령이 아닌가요?”하니까 그들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곳에서 참된 President는 Harvard 대학의 President이지, 미국대통령이 아니라오.”하는 말이 있듯이, Harvard대학에 관한 존칭이라네.”하셨던 기억은 난다.
또한 아버지가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 다니셨단 말씀도 들었다. 또 대학시절에 서울의대가 Minnesota의과대학으로 부터 자매결연을 맺어서 교수님들이 1, 2년씩 가셔 그곳에서 교육도 받으셨다는 말씀은 들었다.
우리 두 아들이 어렸을 때 나는 아직 초등, 중등,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에 관한 교육제도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Time magazine에서 Boarding Schools에 관한 기사가 있어서 그곳은 전통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대대로 자녀를 보내 교육시켰다고 막연히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아버지 모교 Williston Seminary 즉 내가 방문하였을 때에는 Williston Academy가 Boarding school이란 걸 알았을 때 나도 갑자기 우리 두 아이들도 이런 곳에 보내서 교육을 시켜야 되겠단 의지가 생겼다. 만리 타향에서 70여년전에 오셔서 다니셨던 Boarding School에 이곳에 사는 우리가 못 보낼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집에 와서 불이나케 Boarding Schools과 Ivy League Colleges에 관한 정보를 계속하여 얻었고, 아이들에게 그런 교육을 받으라고 격려하였고, 처음에는 9학년부터 Boarding Schools에 가는 걸 주저하였지만, 맏아들 Henry가 Choate School에 간지 얼마 안되어서 대단히 만족하다는 편지를 받았다. 여기서 힘을 입어 둘째 James 역시 Choate을 졸업시켰고, 그 후 Henry는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 James는 Harvard University에서 교육받고 졸업하였고, 그 후 Henry는 Columbia Business School을, James는 MIT Business School을 각각 졸업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모두 아버지가 Boarding School에서 교육을 받으셨음을 알게 된 후에 우리의 교육방향이 완전히 결정되었으니, 이는 전적으로 아버지의 교육받으셨던 발자취에서 이루어진 성과라고 믿는다.

이 기회는 1979년 8월 말 마지막 일요일에 왔다.
내가 Los Angeles CA에서 온 처질녀를 방금 입학한 Smith College 기숙사에 데려다 주려고, 우리 가족을 모두 태우고, Northampton, MA로 갔다. 기숙사에 그 질녀와 짐을 내려 넣은 후, 거기서 5 마일 남짓한 거리에 있는 옛 Williston Seminary이며 그 당시 이름이 변한 Williston Academy에 처음으로 도착하였다. 거기서 동창회장을 만나, 갖고 온 아버지의 Williston Seminary 학급사진을 보이고 많은 정보를 받았다.
그때 내가 회장께, “이 학교가 Boarding School입니까?”하고 물었더니,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였으며, 차 안에 있었던 11세의 Henry와 8세의 James를 보고 그들의 나이를 물어보고, 나에게 혹시 우리가 그들을 추후 Williston에 입학시키고 싶으면, 지원서에 선친의 학교경력, 오늘 자기와 만나서 한 이야기를 자세히 써서 보내라고 친절히 설명하여 주었다. 그때 우리 차에 함께 계셨던 장모님께서 아버지의 경력과 오늘 아이들을 데려 온 일이 우리에게 좋은 인연이고 앞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가져다 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후 우리는 Boarding School에 관해서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고, 또한 많은 관심을 갖게 되어서 두 아들을 모두 Choate Rosemary School에 입학시켰다. 그 후 Henry는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 James는 Harvard University에 보냈고, 졸업 후 Henry는 Columbia University에, James는 MIT에 가서 모두 Business School을 마치고, MBA가 되었다.
우리 부부가 이렇게 분발하여 두 아들에게 이런 교육을 시킨 것은 모두 아버지의 옛 조기유학에서 얻은 경험담에서 비롯하게 되었다.

물론 자녀 교육에 올바른 인간을 만드는 게 우선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좋은 학교 교육임에 틀림없다.
지금도 우리 두 며느리가 만나서 아이들 교육에 관하여 이야기하면, 학교 성적보다 참 된 인성을 함양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점에 합의한다. 그게 바로 저희"들의 시조부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다. 아마 세속적인 실리주의에 물들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대학교육을 우선시 함은 부인할 수 없다. 반드시 일류대학이라야만 된다는 뜻은 아니고, 자신에게 적합한 좋은 대학에 가서 만족하게 공부하면 그것이 최선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여간 아버지의 힘들었던 10년 유학이 손자 대에 와서 꽃을 피게 되었다고 나는 굳게 믿고, 그런 점에서 나는 항상 아버지의 고난의교육시절을 잊지 않는다.

 
Kwan Ho Chung - February 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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