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부터 1945년까지 부산항과 시모노세키 항 사이를 정기적으로 운항한 여객선을 기리킨다.
러일 전쟁이 종결된 후 경부선 철도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연장되자, 이를 계기로 일본의 산요기선주식회사[山陽氣船株式會社]는 일본의 산요선 철도와 한국의 경부선 철도를 연결하기 위한 선박 수송을 계획하고, 정기 여객선 운항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05년 9월에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잇는 1,680톤 급의 정기 여객선 이키마루[壹岐丸]가 시모노세키 항에서 취항하였다.
이것이 일본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첫 번째 정기 연락선이었다.
이후 1945년 일본의 패전 직전에 미군의 공습으로 항로가 차단되면서 정기 여객선으로서의 생명이 중단될 때까지 관부 연락선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대표적인 운송 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일본의 패전 직후에는 한때 한반도와 일본에서 귀환자들을 수송하는 선박이 이 항로를 정기적으로 왕복하였다. 일제 강점기 여객 수송과 해방 직후의 귀환자 수송을 합하면 총 3000만 명 이상의 승객이 관부 연락선을 이용하였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된 후 부산시와 시모노세키 시 사이에 정기 여객선 재개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 결과 1970년 1970년 6월 19일에 관부 페리호가 운항을 시작하였고 1983년 4월 27일에는 부관 훼리호가 운항을 시작하였다.
일본 재계를 중심으로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하는 정기 항로를 취항시키려는 움직임은 개항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실업가이며 제일국립은행(第一國立銀行) 총감인 시부자와 에이이치[澁澤榮一]는 부산을 방문하여 일본인의 상업 실태를 시찰하였다.
그 후 최초의 일본인 무역 상사인 대창조상회(大倉組商會)를 설립 운영하고 있던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와 공동으로 서명하여 1877년 8월에 정기 항로 개설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들은 메이지 정부의 대장성(大藏省)에 조선과의 무역을 확장하기 위해 자금 10만 엔을 대부할 것과 매월 2~3회의 정기 항로를 열 것을 건의하였다.
이때 메이지 정부는 규슈[九州]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으로 인해 혼란한 정국이 진정된 후에 운항을 허락하겠다고 회답하였다.
1890년대에 들어서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인적 이동과 물동량이 증가함에 따라 정기 항로 개설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893년에 일본의 민간 회사에 의해 인천과 오사카[大阪] 그리고 모지[門司]를 연결하는 645톤 급의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가 취항하였고, 이어서 1902년에는 원산과 4, 원산과 모지를 연결하는 746톤 급의 스미다가와마루[隅田川丸]가 취항하였다.
이 두 선박의 운행이 근대 한일 양국 항로의 효시가 되었으며 부산~시모노세키 사이의 항로에 정기 연락선이 취항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05년 9월 11일 밤 이키마루[壹岐丸] 선박이 시모노세키 항을 떠나 다음날 아침 부산에 도착하였다.
당시 운항 시간은 11시간 30분이었고 여객 운임은 1등실 12엔, 2등실 7엔, 3등실 3엔 50전이었다.
이키마루 선박은 길이 82미터, 폭 10.9미터, 총 규모는 1,680톤에 달하였다. 여객 정원 317명, 화물 300톤을 적재할 수 있는 규모였다.
영국의 해외 항해 선박을 모방하여 만들어져 선단에서 선미까지 평평한 갑판으로 되어 있었다.
1905년에는 부산항에 이 배를 직접 접안시킬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초량 앞바다에 정박한 후 소형 선박을 통해 승객과 화물을 부두로 이동시켰다.
그 후 부산항과 시모노세키 항의 접안 시설이 근대화되면서 정기 여객선의 규모와 편수가 계속 늘어갔다.
일제 강점기에 걸쳐 시기에 따라 약간 승객 수가 감소한 경우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연락선을 통한 인구 이동은 계속 증가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1943년 10월 미국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곤론마루[崑崙丸] 선박이 침몰하는 등 피해가 심해졌다.
1945년 6월 20일 일본 정부는 관부 연락선의 모든 선박을 안전한 항로로 옮길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의 항로는 사실상 중단되었으며 일제 강점 하의 관부 연락선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유행가 : 연락선은 떠난다.
가사 I
쌍고동 울어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 가소 잘 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진정코 딩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가사 II
파도는 출렁출렁 연락선은 떠난다
정든 임 껴안고 목을 놓아 웁니다
오로지 그대만을 오로지 그대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한숨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가사 III
바람은 살랑살랑 연락선은 떠난다.
뱃머리 부딪는 안타까운 조각달
언제나 임자만을 언제나 임자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끝없이 지향없이 떠나갑니다. "아이 울지 마세요"
옛 LP판에서 나오는 노랫소리가 너무 희미하다. 그래서 최근에 부른 다른 가수의 노래를 다시 실었다.
박영호(朴英鎬) 작사, 김해송(金海松) 작곡, 장세정(張世貞) 노래의 대중가요.
1937년 오케레코드에서 발매한 음반에는 박영호 작사, 김송규(김해송의 본명) 작곡으로 표기되어있다. 일제가 36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함과 동시에 대륙침략의 도구로 이용하였던 관부연락선에 얽힌 노래이다.
대한해협을 오가는 연락선은 우리 민족에게는 한과 비애의 대상이었고, 일본인들에게는 기쁨과 희망의 연락선이었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는 사지(死地)로 끌려가는 눈물의 뱃길로, 이런 서민감정을 표현한 감성적인 노래이다.
평양의 한 백화점의 여점원이던 장세정은 이 노래 한 곡으로 불세출의 정상급 가수가 되었다.
전형적인 일본의 단조음계로 구성된 엔카풍(演歌風)의 노래이다.
8ㆍ15광복 후 작사자 박영호는 월북하였고, 작곡자 김해송은 K.P.K악단이라는 쇼단을 구성하여 미국의 재즈음악과 우리나라의 민요를 접목시킨 음악으로 개성 있는 무대를 꾸몄다.
불행히도 6ㆍ25동란 때 납북되어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다. 1951년 일본의 인기여가수 스가와라 쓰즈코(菅原都都子)가 「연락선의 노래(連絡船の唄)」라는 제목으로 취입, 크게 유행시켰는데, 작곡자 이름을 가네야마(金山松夫)로 표기했다. 엔카풍의 노래라서인지 지금도 일본에서는 그들의 작품으로 알고 있다.
가곡 “연락선은 떠난다”는 1937년에 처음으로 출품되었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가수 장세정은 Top singer로 등극하였다.
1937년은 내게 대단히 중요한 해이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태어났던 해였기 때문이었다.
나의 셋째 누나는 그해에 다니던 동경여의전 방학이 되어서 귀국하여 집에 와서 방금 태어난 나를 보았다고 한다.
그 누나는 학교 다닐 때 장세정공연이 있다면 학급친구들과 몰려 가서 그녀의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그 가사가 너무나 슬프다.
우리나라 장정들은 일제의 강요로 강제 징집되어서 탄광에 가서 막노동을 하였고, 많은 젊은 이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집안에 있던 가족들 특히 아내들은 울면서 인천항에서 젊은 남편을 보내던 광경을 노래로 불렀으니, 지금 들어도 너무나 슬프다.
나라를 빼앗긴 후 무죄한 백성, 특히 젊은 이들이 그 수난을 겪어야 했다.
보상은 고사하고 살아서 돌아오기만 해도 다행이었던 그 당시 참상이 떠나지 않는다.
언젠가 나도 부산항에서 이 여객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시모노세끼에 도착하여 우리의 장정들을 애도하고 싶다.
연락선은 떠난다
2024.05.20 03:09
2024.05.20 08:32
작년 10월에 후쿠오카, 나가사끼, 시모노세끼를 관광했습니다. 부산에서 비행기로
1시간 정도 걸립니다. 한국 사람들이 온천, 골프, 낙시, 관광으로 무척 많이 다닙니다.
일년에 6조원(?)을 쓴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전쟁 전에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을 시켜
시모노세키에 조선 공격의 총본부를 건설하게 했슴니다. 말하자면 침략의
런칭 패드였지요.
이토 히로부미는 이곳에서 중국의 이홍장을 불러 청일전쟁의 종전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이를 시모노세끼 조약이라고 하는데 이 조약은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청의 조선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일본의 서쪽에 위치한 규슈와 혼슈의 남단 조슈번은 한국의 영남처럼 일본
보수의 고향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토 히로부미도 이 지방 출신입
니다.
일제시절에 일본에 유학했던 젊은 청년들이 세상을 비관했다는 이야기도 듣고 소설책에서도 읽었다.
어떤 젊은이는 간혹 연락선타고 왕래하던 현해탄에서 몸을 던졌다.
나도 한번 부산항에서 연락선타고 일본 시모노세끼에 가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럴 기회가 없었다.
이제 이나이에 기다리면 언제 할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으로 연락선 이야기와 가곡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