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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扶餘國: 부여국 I

2024.06.01 01:30

정관호*63 Views:83

 

 

扶餘國: 百度百科[BAI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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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餘國(부여국)

 

 

부여국은 공원전2세기(BC 2nd century)부터 공원494(AD 494)]년간 있었던 부여인의 정권이며, 조선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지구에 세운 부여인정권국가(扶余人政權國家)였다.
전기왕성(前期王城)은 길림성길림시(吉林省吉林市)에 있었고, 후기왕성(後期王城)은 길림성장춘시농안현(吉林省長春市農安縣)에 있어서, 여기에 곡물이 풍성하며, 또 많이 남았다. 부여는 그 가운데 땅을 합치고, 점령하여 망인(亡人)이라고 칭하였다.
부여국은 기원전2세기(BC 2Century)에 세워서 AD 494년 까지 내려오다가 동부여국(東扶余國)은 고구려(高句麗)에게 멸망 당하였다. 이외에 옥저(沃沮)와 동예(東濊)가 모두 부여의 형제민족이었다.
송눈[松嫩: Sōng nèn]평원에 일종의 나무가 있어, 나무에 먹을 수있는 소금이 있었고, 고대의 동호인(東胡人)은 송눈평원(松嫩平原}에 이르러 그들은 일종의 소금을 먹는 사람을 부여라고 불렀다. 이것이 부여란 명칭의 다른 한가지 해석이다.

 

 

領土疆域(영토강역: Territory)

 

 

《후한서: 後漢書》권85(Volume 85) 동이열전(領土疆域} ; 부여국은 현토북(玄菟北) 천리(千里}에 있고, 남으로 고구려(高句麗), 동으로 읍루(挹婁}, 서로는 선비(鮮卑)와 접하고, 북에는 약수(弱水)가 있었다. 지방은 2천리(二千里)이고, 본래 길고 넓은 땅이었다. 그 위치는 오늘날 중국길림성(吉林省)에 상당하였다.
부여국의 기원지는 현재 길림(吉林), 요령북부(遼寧北部)인데, 흑룡강중부(黑龍江中部)로서, 대체로 부여왕성(장춘시:長春市 )를 중심으로하고, 길림성장춘시(吉林省長春市), 길림시(吉林市), 송원시(松原市), 사평시(四平市), 백성시(白城市), 요동성창도현(遼寧省昌圖縣), 흑룡강성화남현(黑)龍江省樺南縣)을 모두 그 국토로 포괄한다.
부여가 가장 강성할 때 영토는 만리장성이북(萬裡長城以北에 이르렀고, 남으로는 고구려에, 동으로는 읍루[挹婁(滿族先祖)]에 이르렀고, 서로는 선비(鮮卑)에 접하여, 방원[方圓: Radius 반지름]이 이천여리[二千餘里: 현재 약 九百公里(900 km)]였다.
부여전국세습[扶余傳國世襲; Fuyu passed down the country hereditary]은동명왕-갈사왕-도두왕-부대왕-위구대왕-간위거왕-마여왕-의로왕-의라왕-현왕-여위왕[東明王——曷思王——都頭王——夫台王——尉仇台王——簡位居王——麻余王——依慮王——依羅王——玄王——余蔚王]이었다.

 

 

歷史沿革[역사연혁: History]

 

1, 春秋戰國時期[춘추전국시기: History]

 

 

춘추전국시대에 생활하던 동북남부(東北南部)의 맥족(貊族)이 대이동을 개시하였다. 일부분은 북으로 이동하여 예왕국예족(濊王國濊族)에 접근하였다. 당시에 동북은 4개의 고족계(古族系)가 함깨 공유하고 있었다: 동북남부는 고상족으로 한족계[古商族(漢族)系]; 동북서부(東北西部)는 동호족계(東胡族系); 동북동부(東北東部}는 숙진족계(肅慎族系); 동북중부(東北中部)는 예맥족계(濊貊族系)를 이루었다. 부여는 처음으로 중국사적中國史籍)에 기재되었다.
《史記·貨殖列傳; 사기 화식열전 》: 연나라(燕)에서는 상곡(上谷)애서 요동(遼東)까지 땅이 멀었고, 백성은 드물고, 때로 도적수가 조(趙)나 대속(代俗)과 비슷하였고, 만일 백성이 쉽게 방어하려면 물고기, 대추와 밤을 충분히 가져야 했다. 북으로는 오환(烏桓)과 부여를 이웃하고, 동으로는 예맥(穢貉), 조선, 진번(真番)과 이롭게 연결되었다.
산해경 해내서경(山經·海內西經)애 기록하되: 맥국은 한수(漢水, 今遼河), 동북에 있고 땅이 연(燕)애 가까워 멸(滅之)하였다. 연은 그땅이 이룡호고성(二龍湖古城)에 위치하였다. 연, 진, 한, 위[燕秦漢魏]의 도읍은 일찍이 요수(遼水)애 있어서 동편에 장새(障塞; 요새와 보루)를 설치하고, 춘추전국시기에 연국은 요동군민의 정벌체계를 설치하였다.
연국진번장새(燕國眞番障塞)는 연국점선식장성체계의 한가지 특점[燕國點線式長城體系的一個特點]이며, 비하건대 요서군저명적적봉시경내구택적구택도(遼西郡著名的赤峰市境內狗澤的狗澤都)이며, 요령성경내수척우적얀안도(遼寧省境內水泉的陽安都)이며, 대릉하의 백경도(大凌河的白庚都)이며, 유성도(酉城都)와 같다. 강해의 상하장(江海的上下障)은 길림성장내요하원두적사평이룡호구성(吉林省境內遼河源頭的四平二龍湖古城), 길림성경내압록강중우안적통화시(吉林省境内鸭绿江中上游右岸的通化市), 그리고 백산시(白山市)위로 흐르며, 거기에 대량장성유적(大量的長城遺跡)이 있다.
장성(長城)은 점성식장새형제(“點線式”障塞形制: the "point and line" barrier structure)로 주체가 되어, 역사상 중원왕조(中原王朝)가 어업과 수렵하는 모든 종족의 대본영(大本營)을 통할(統轄)하였다. 연새-양평-후성-이룡호고성-진번[燕塞—襄平—侯城—二龍湖古城—真番]의 장새선고고학적 조사(障塞線考古調查)로부터 사적문헌기재(史籍文獻記載)를 새로 발견하여서, 전국시 연(戰國燕)은 가장 일찍 동북지구(東北地區)의 변경을 열고 다스렸으며, 장성을 쌓아서 그 군형에 중원국가를 설치하였다.

《사기·조선열전(史記·朝鮮列傳)》또한 기재되기를: 연국(燕國) 시작때부터 조선(朝鮮)과 진번(真番)에 속하여 관리를 두고 장새(障塞: barrier)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요동외인지역(遼東外人地域)에 속하여 순찰하였다. 여기서 두번째 요동군(遼東郡)은 양평성[襄平城: 현재 요양시구고성(遼陽市區古城)]을 다스렸고, 이것이 진번장새(真番障塞)와 조선장새(朝鮮障塞)의 두갈래의 교통주선의 맺음(樞紐:The hub)이었다.
삼차로 길림성통화시혼강(吉林省通化市渾江) 중류와 지류가 부이강과 재고하(富爾江、蝲蛄河)로 흐르고, 대라건구하(大羅圈溝河)양안에서 숭산준령(崇山峻嶺)위와 구곡애구(溝谷隘口)간에 전국진한시기(戰國秦漢時期)에 새로 발견된 180여곳(段、道、墩、座)에서 모두 전형적중원문화의 특정적 새담, 열수, 열장, 열보, 열애급, 열성유지[“塞垣”、“列燧”、“列障”、“列堡”、“列隘”及“列城”遺址]가 구비되었다.
심양-무순-통화-집안-임강(沈陽—撫順—通化—集安—臨江)(含朝鮮慈城郡)—長白(含朝鮮惠山市)-장백(長白)초선혜산시포함;朝鮮惠山市)지간의 장새(障塞)가 7이고, 2개가 연결되어 완전한 하나의 선(線)을 만들고, 이 선은 이미 장새시설이 300이상이며, 그 길이는 850km이고, 그 주요형태는 점선식장식장새구조(點線중부와 상부범위형태는 “선조식(線條式): line-type”이고, 장담(長垣)구조와 선단식(線段式; Line segment type) 단담(短垣)구조였다. 종점(終點)은 요동군진번장새(遼東郡真番障塞)였다. 장기적역사연변(長期的歷史演變; Evolution)을 경과하였고, 장춘지구(長春地區)는 원래 단민족취거구(單民族聚居區)로부터 다민족적취거지구(多民族的聚居地區)로 발전하였다. 사적(史籍)《후한서: 동옥차전: 後漢書·東沃且傳》、《삼국지 연전:三國志·沿傳》에서 , 당시 장춘일대(長春一帶) 예족등( 濊族等) 여러개의 민족활동적 정황을 기재하였다.

 

 

漢朝時期(한조시기)

 

 

서한초기(西漢初期)에 부여인은 장춘지구의 주체거민(長春地區的主體居民)이었다. 공원3세기(AD 3rd Century)에 정권을 세워서 역사에서 부여국이라고 칭하였다. 그 전기와 후기의 왕성은 현재 길림시와 장춘시( 농안현 일대(吉林市和長春市農安縣一帶)이다. 부여국은 농업이 위주였고, 목축업(畜牧業)이 발달하고 수공업(手工業)도 비교적 발달하였다. “그 나라는 은부(殷富; 풍성하고 넉넉함)하고, 네모로 2000 Sq Miles(方二千里)이며, 8만호(戶八萬)”이였다. 동한말년(東漢末年)에 부여왕성은 30,000호였고, 총인구는 200,000이었다.
동한건무25년(建武; AD 49), 부여왕은 사신을 보내서 특산물을 받쳤고, 광무제(光武帝)는 후히 답하고 상을 주었다. 이리하여 동한의 사신은 부여와 교류하였다. 한안제영초5년(漢安帝永初五年: 111년)까지 부여왕은 여러번 변경을 침범하였고, 보병과 기병 7, 8천명을 거느리고 낙랑군(樂浪郡)을 침범하여 관리와 백성을 해쳤고, 후에 다시 스스로 와서 복종하였다.
영영원년[永寧元年(120年)]에 왕자위구태(王子尉仇台)를 보내어 낙양에 와서 조공을 받치니, 한안제(漢安帝)는 위구태에게 황금색 인장을 주었다. 한순제영화원년[漢順帝永和元年(136年)]에 부여왕이 친히 경사낙양(京師洛陽)에 와서 조공을 올렸기에, 한순제(漢順帝)는 많은 놀이로 접대하였다.
한환제연희(漢桓帝延熹) 4년에 거듭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받혔다. 영강원년(永康元年)에 부여왕부태(夫余王夫台)는 2만여명의 군을 거느리고 현토군(玄菟郡)을 침범하여, 현토태수공손역(玄菟太守公孫域)이 격파하고 천여급을 참수하였다. 힌영제희평(漢靈帝熹平) 3년에 이르러 거듭 조공을 올렸다. 부여는 본래 한대현토군(漢代的玄菟郡)에 속하였고, 한헌제(漢獻帝)때 그왕이 요동군(遼東郡)에 속히기를 청하였다.
부여국의 도성(都城)은 부여왕성(王城)이었고, 부여족을 이루었고, 길림시지구(吉林市地區)는 가장 일찍이 출현한 도시의 하나였다. 부여왕성은 목책성(木柵城: 울짱. 말뚝 따위를 죽 잇따라 박아 만든 울타리성)이었다. 성시(城市)형상은 원형이었다. 부여왕성은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 후기왕성은 장춘시농안현(在長春市農安縣)에 있다.

 

 

진대시기(晉代時期):

 

 

서진(西晉)이후 부여의 국세는 쇠락하였다. 공원289년(AD 289)에 서부선비족(西部鮮卑族)이 침입하여, 부여왕은 자살하고, 부여국은 일차로 멸망하였다. 제2년 진무제(晉武帝)가 파병하여 나라를 회복하는데 도왔다. 공원346년에 부여왕성 유희도(由喜都)를 농안(農安)으로 천도항였다.
470년에 남부고구려족(南部高句麗族)이 침입히여서, 54개 성과 1400개 촌락(村落)을 파괴하여다. 493년 북부물길족[北部勿吉族(滿族先民一支)]이 침입하여, 부여왕이 고구려로 달아났고, 그나라는 멸망하였으니 부여건국 600여년이었다. 농안일대(農安一帶)는 고구려에 점령되었고, 또 통치하기 200여년이었다.

 

 

당조시기(唐朝時期)

 

 

당조시기에 이르러 당조의 정벌을 막으려고 고구려는 요하(遼河)남으로 따라 영구[營口: 중국(中國), 용령성 남부(南部), 요하 어귀에 가까운 항만(港灣) 도시(都市)]를 일으키고, 북으로 농안에 이르러 길고 긴 토루[土壘: 보루(堡壘: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튼튼하게 쌓은 구축물)]를 수축하여서, 역사에서 칭하기를 천리장성(千里長城)이라 한다. 북위(北魏)에서 당초(唐初)까지 동북동남부(東北東南部)는 고구려강역[疆域: 한 나라의 통치권(統治權)이 미치는 지역(地域)]이었고, 원래의 부여고도는 고구려부여부(高句麗的扶余府)가 되었다.
668년 당이 고구려를 격파하여 이때 당의 하북도(河北道)가 되었다. 713년 숙신족(肅慎族)의 후예 속말말갈(粟末靺鞨)이 그 수령대조영(大祚榮)영도하에 발해국(渤海國)을 건립하고, 아울러 5경15부62주[5京15府62州]를 설치하고, 원부여도성소재지(原扶余都城所在地)에 부여부(扶余府)를 https://www.google.com/설립하여 국도로 정하고 그 아래 부주, 선주[扶州、仙州]를 할당하였다. 후에 오동성(敖東城)으로 천도하였고, 오로지 부여부는 발해국문화경제중심으로 제일대성시(第一大城市)였고, 경제문화가 발달하여 인구가 조밀하여, 총인구는 이미 50만이상이 되었다.

 

 

史料記載(사료기재) 起源(기원)

 

 

夫余始祖(부여시조)


동명(東明)은 전설의 부여시조다. 부여의 건국전설에 관하여 허다한 사적중에 기재되었는데, 가장 이른 것이 《논형 길험편:論衡·吉驗篇》이다.
자리(橐離)국왕이 출행시 그의 시비가 잉태하여서, 국왕이 돌아온후 대노하였고, 그녀를 사형시키려고 했다. 시비는 그에게 설명하기를: 당시 천상을 보니 한개의 숨쉬는 김을 (一股氣; 一口气; One breath of air)보았고, 그 기운이 계란만큼 켰으며, 자신의 몸에 올라와서 잉태하였다. 국왕은 아직도 노함이 풀리지 않아서 감옥에 가두었더니 후에 한 남아를 출생하였다.
그 후 국왕은 사람을 명하여 그 어린아이를 돼지우리속에 넣었더니 뭍 돼지는 그에게 입김을 불어넣었고 죽이지않았다. 국왕은 다시 말우리속에 넣고, 한떼의 말이 그를 밟아죽일거로 예상했지만, 오히려 웉말은 뭍돼지와 마찬가지로 입김을 불어서 죽지 않게 하였다. 국왕은 이 남자아이가 신인(神人)의 아들로 생각하고 그를입양하였고, 아울러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동명이 자란 후 무예에 용감하고 활을 잘 쏘았기에 국왕은 그가 자기의 왕위를 찬탈하지 않을까 근심하고, 시기하여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동명은 이를 알고 도주하여 엄수(淹水)에 이르렀을 때, 다리는 없고 추병이 가까워져서, 활로 물을 때리니, 무수한 물고기와 자라가 물위로 떠올라서 한개의 대교(大橋)를 형성하여 동명이 그다리를 타고 건넌 후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서 추병이 건널 수없어서, 동명은 안전지로 도주했고,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구에 부여국을 세웠다.
각각 역시에서 동명의 사적이 기록되기를 대략 위에 서술한 바와 같고, 오로지 여기서 지적해야 할 한가지 문제는 고구려 주몽의 건국전설과 똑같다. 둘을 비교하면 주몽의 건국전설은 동명의 건국전설보다 시기가 늦을 뿐이다. 고구려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高), 이름은 주몽(朱蒙)은 부여에서 나왔다.
부여국왕은 한여인을 만나서 자칭 하백(河伯)의 딸이라며 이름은 유화(柳花)였다. 부여왕은 그녀를 데리고 귀국중에 밀실(密室)에 유폐(幽閉)하였다. 어느날 햇빛이 유화의 몸에 비추어서 몸을 옮겨서 피하였더니, 햇빛이 그몸을 따라오고, 이리하여 임신하였고, 멀지 않아서 5근이나되는 큰 고기공을 출생하였다. 부여왕은 그것을 돼지개 무리속에 던졌더니 돼지개가 먹지 않고 또 야외에 이르렀더니, 날아오는 새무리가 날개로 덮었다. 최후로 부여왕은 칼로 쪼개서열려고 하니, 깨지지 않아서, 최후로 유화에게 돌려주었더니, 유화는 잘 감싸서 따뜻한 곳에 내려놓았고, 멀지 않아서 남자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 이 소년이 7세이후 용맹이 비할 수없어서 이름을 주몽(朱蒙)이라 하였다. 주몽은 고구려말로 “활을 잘쏜다”는 의미다. 주몽은 더욱 더 왕자들의 시기를 받고, 최후로 모친의 도움으로 세명의 심복을 이끌고 국외로 도주하였다. 남쪽으로 가는 길에서 강물을 만났는데 다리가 없고 이때 부여의 추병이 이르렀기에 사벙이 급한데, 주몽이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河伯外孫)이며, 내뒤에 추병이 이르니 내가 어찌 강을 건널건가?” 말이 끝나기전에 곧 물고기와 자라가 무리를 저어 이르러 눈을 깜박할 새에 큰 다리를 만들어 주몽과 일행이 강을 건널 수있었고,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져 가버리고 추병은 건널 수없었다. 후에 주몽은 사람들을 이끌고 흘승골성(紇升骨城)자구에 이르러 고구려왕국의전신(高句麗王國的前身)-졸본부여(卒本夫余)를 창건하였다.
부여와 고구려양개건국전설을 비교하여보면, 후자가 더욱 풍만함을 제외하면 더욱 정제되고 극적임외에 기본내용은 별 차별이 없고, 더욱 주몽과 동명이 서로 가깝고, 또한 조선반도사서 삼국사기 [朝鮮半島史書《三國史記》]에서 거듭 주몽(朱蒙)을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칭하였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의문을 일으키지 않을 수없다. 주몽과 동명이 한사람인가? 혹은 두사람인가?
현재 학계에서는 다름 관점들이 있으니, 그중 주요 관점이 인정하기를, 고구려가 부여의 건국전설을 차용함이니, 그 원인은 부여건국이 고구려의 전이고, 그 건국전설기재도 후자보다 수년을 앞섰다. 인하여 후자는 응당 고구려가 점차 (강대하게 된 후 자기의 역사를 거듭 유구(悠久)하고 휘황(輝煌)하게 하였고, 동시에 이는 왕족의 신성성(神聖性)을 보이려고, 부여의 건국전설에 기초하여 본민족의 건국전설을 형성함에 예술적가공을 하였다.
동명의 기사는 오로지 역사전설속에서 발견되었으니, 동명은 응당 그 원형이고 이 사람은 반드시 부여민족이 만든 거대한 공헌의 인물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응당 동명을 부여의 시조로 본다. 이 역사전설이 비록 비역사사실이라도 오로지 그중에 사실이 필연적으로 진실한 성분을 가졌다.

 

 

民族構成(민족구성)

 

 

2000여년전부터 북동부의 남부에서 살았던 맥족(貊族)이 대이동을 개시하였다. 일부분은 북으로 이동하여 그 종족에 접근하였다.
《한서.왕망중: 漢書·王莽中》기재: 망이 책명(策命:왕이 신하에게 명령내리다) 가로되: 넒은 세상에 사방으로 이르러, 도착치 않은 곳이없다. 동으로 나가면 현토(玄菟), 낙랑(樂浪), 고구려(高句驪). 부여(夫余)。”부여는 본래 현토군 관할에 속했다가 헌재시(獻帝時)애 부여왕이 요동군(遼東郡)에 속하기를 구하였다. 그 이유는 삼국지《三國志》에 이른 바와 같다: “부여는 본래 현토에 속하다.”
한말(漢末)애 공손도(公孫度)는 해동(海東)으로 진출하여 위세로 외부오랑캐를 복종시키고,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다시 요동에 종속하였다. 헌제시(獻帝時)에 공손도(公孫度)는 요동(遼東)을 할거(割據)하여, 농민을, 시켜 농사를 짓고, 군을 다스리고, “동으로 고구려를 치고, 서로 오환(烏丸)을 공격하여, 위세를 해외에 떨쳤다.
이때 고구려와 선비는 강하여서, 부여는 이 둘사이에 끼어서 종녀(宗女; 君主同宗的女儿)로 아내를 삼았다. 또 부여와 예맥은 함께 사용했다. 고고학문화연구(考古學文化研究) 성과에 따라보면, 생산(產生)에 강렬한 영향을 받아서 길림시(吉林市)를 중심으로 삼고, 남으로 통화지구북부(通化地區北部)에 이르러, 부여문화는 한문화의 더 많은 인소(因素)를 흡수하였고, 예컨대 유수노하심이기화(榆樹老河深二期化)에서 출토된 한나라식 철제생산공구(漢式鐵制生產工具), 삽, 촉(鍤、鑿); 네 유방과 네 거울(四乳四蟠紋鏡), 네 유방과 여덟개새 거울(四乳八鳥紋鏡), 네 신과 거울(四神規矩鏡), 일곱유방과 일곱짐승거울(七乳七獸紋鏡), 금속구리띠 갈고리와 은과구리따갈고리(金銅帶鉤和錯銀銅帶鉤), 오주전등(五銖錢等)이다.
길림시모아산부여묘장속(吉林市帽兒山夫余墓葬中)에서 정미한 칠렵합(漆奩盒; 옻상자뚜껑), 이배(耳杯: 귀잔), 작화사직품등(勺和絲織品等; 구기와 비단직물등)이 출토되었다.
부여국중심지역(夫余國的中心地)에는 단순히 한문화된 유적이 나오며, 이문신선생이 인식하기를, 용담산정거장(龍潭山車站)에서 동단산자간(東團山子間)애 철도양측에 한족문화유물(漢族文化遺物)이 종류 가 많았고, 출토범위가 넓었고, 이는 분명히 동북토착민의 소유(東北土著民所有)가 아니었고, 한인(漢人)이 이곳에 이주한지 오래되었고, 사람수가 대단히 많았음에 의심이 없다.
만약 이문신선생(李文信先生)의 말처럼 부여지구에서 출현한 한인취거한 점은 부여와 종주국(宗主國)사이에 관계가 극히 밀접하였음을 설명한다.
부여는 북방의 고국명(古國名)아며, 또한 부유(鳧臾), 부여(扶余)로서 옛 동북아민족(古東北亞民族)인 예맥(濊貊)의 별족(別族)아 세웠다. 고구려와 백제의 왕실은 모두부여인으로부터 왔다. 이외에 북옥저(北沃沮), 동옥저(東沃沮), 예등(濊等) 모두 부여의 형제민족이다. 거기에 곡식이 풍성하고, 양식이 많이 남았고, 그 이유로 부여인의 성격이 모두 따뜻하고 후했다.
대략 전국(戰國) 혹은 서한초(西漢初)에 흑룡강송눈평원남부(黑龍江松嫩平原南部)에 있어 지금 곽이라사초원[(郭爾羅斯草原); 송원대경남부지구(松原大慶南部地區)]로서 거의 길림성중부지구(吉林省中部地區)로서 예맥족의 일개 지계(支系; Branch)인 부여족(夫余族)으로 이는 북방송눈초원의 주민(主民)이었다. 부여족은 농업이 위주였고, 축목업이 발달하였고, 수공업도 비교적 발달하였다. 공원3세기에 정권을 세워, 부여왕국을 이루었다. 나라는 부유했고, 정사각형의 2000 miles이었고, 80,000호(戶)였고, 동북지구(東北地區)에 제1개민족정권국가(第一個民族政權國家)였다.
위진(魏晉)시기에 부여는 위, 진에게 조공하였다. 삼연[三燕(前燕、秦、後燕: 전연, 진, 후연)]시기(337-407년)에 부여는 성화촌(城和村) 양급(兩級)을 건설하였다. 410년 (晉安帝義熙六年 :진안제의희6년)고구려국 호대왕(高句麗國好大王)이 부여국을 정벌하여, 성64개, 촌1400개를 공격 파괴 하였다. 선비(鮮卑)로부터 여러차례 침범을 당하여 고구려공격이 약화되었고, 494년(北魏太和十八年: 북위태화18년)에 물길(勿吉)에게 멸망을 당했고, 주민은 분산하여 이주하였다.
부여의 최강시기는 강역(疆域)이 만리장성이북(萬裡長, 城以北)까지, 남으로는 고구려에 그리고, 읍루(挹婁)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선비(鮮卑)에 접하여서, 직경이 대략 2,000리였다. 부여국이 중원왕조(中原王朝)와 관계는 밀접하였고: 한나라시절 현토군(玄菟郡)의 통할(統轄)을 받았고; 위나라시기에 요동공손씨정권(遼東公孫氏政權)에 신복(臣服)하였고; 진나라시기에 항상 중원조공을 하였다. 부여국은 역사에 유구한 민족국가이었고, 탁리국왕자동명(橐離國王子東明)은 남하하여 건설하였고, 일부 주민은 동천(東遷)하여 동부여국(東夫余國)을 함께 세웠고(후에 고구려에게 멸망당함), 세운지 700년전이었다.

 

 

對外關系(대외관계)
周邊國家(주변국가)

 

 

동명이 건립한 부여국은 노예소유정책의 국가이었다. 건국초기에 국세(國勢)가 제법 강성하였다. 그 통치계급은 노예주인 귀족의 이익을 만족하고자, 통치계급은 강력한 군사역량에 의존하여 대외로 항상 전쟁을 발동하였다.
서한시 부여는 우선 동으로 발병하여 읍루(挹婁)를 정복하였다. 단지 읍루인은 험한 지형과 활과 화살을 이용하여 항상 반항하였다. 조위문제황초연간[曹(조조의) 魏文帝黃初年間: 220-226년)]에 읍루인은 다시 부여통치에 반항을 일으켜서, “부여는 여러차례 쳤지만 마침내 정복할 수없었다.” 이후에 읍루인은 부여의 통치로부터 파탈(擺脫; 벗어나다)하였고, 부여는 거듭 읍루인에 대하여 노역(奴役)을 진행치 못하였다.
부여는 같은 주변민족국가(同周邊民族國家)의 관계에서, 고구려의 같은 연계에서 비교적 빈번하고 밀접하였다. 《 후한서 고구려전後漢書·高句麗傳》애 의거하여 기록하기를: 고구려-동이는 부여와 또 하나의 다른 종족이며 언어법측이 많이 같앴다. 이리하여 고구려와 부여의 밀접한 문화관계를 설명하였다.
고구려건국초기에 함께 부여와 친밀하고 우호적관계를 가졌다. 주몽왕 14년(BC 24) 가을 8월보(袱)애 고구려주몽왕(朱豪王)어머니 유화(柳花)는 동에서 부서(扶徐)를 도왔고, 부서왕 금와(金蛙)는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냈고, 드디어 신묘(神廟)를 세웠다. 겨울 10월 주몽은 사자를 부서에게 산물을 보내며 그 덕을 보답하였다. 이 고사하나로서 확실히 당시 부여와 고구려의 우호관계를 반영한다.
후에 그들의 국력이 강성해져서, 부여대고구려는 전쟁을 일으켰다. 고구려 유리왕(琉璃王) 14년(BC 6) 봄 정월 부여왕대소(帶素)는 고구려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강제로 질자(質子) 즉 볼모를 교환하자고 하여서, 유리왕은 “부여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태자를 볼모로 하려고 하였으나, 행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대소를 두려워 하였다. “ 그해 겨울 십일월 대소는 오만병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였으나, 대설(大雪)을 만나 많은 병사가 동사하고, 공을 이루지못하고 돌아왔다. 고구려 유리왕28년(AD 9) 가을8월 부여왕대소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서 편지에 가로되, “무릇 나라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사람은 장성과 어림이 있으니, 작음이 큼을 섬김은 예의며, 어린자가 장성한 자를 섬김은 순리로다. 현재 왕이 예의로서 나를 섬긴즉 하늘이 반드시 도울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전하기 힐들것이로다. 부여의 이런 위협에, 고구려유리왕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라를 세운지 오래지 않았고, 백성과 병사가 약해서, 수치를 참고 굴복을 견디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이에 부여왕대소에게 회보하기를, “과인이 바다 한구석에 궁벽하게 살기에 예의를 듣지 못하였으니, 오늘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명을 따르겠습니다. “ 이후 한편 부여와 정면충돌을 피하고, 다른 방면으로 자기의 군사역량 강화를 긴급히 노력하고, 부여와의 전쟁준비를 하였다. 유리왕32년(AD 13) 동11월 부여가 또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침입하여서, 고구려왕은 아들 무휼(無恤)에게 군사를 주어 저항하였다. 무휼은 병사가 적어서 적을 당하기 두려워서, 기계(奇計)를 세워 친히 군을 이끌고 산중에서 엎드려 기다렸다. 부여병이 온 후까지 기다려서, 복명이 돌연히 일어나 공격하여 부여군을 대패(大敗)시켰다. 이로부터 부여는 고구려에 대하여 군사상 우세를 점령할 수없었고, 점차 수동적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다.
고구려대무신왕(高句麗大武神王) 3년(AD 20) 부여왕대소는 양국간 긴장관계를 완화하고자 사신을 고구려에 파견해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적조(赤烏)를 보냈는데, 그러나 형고세의 발전은 더욱 더 부여에게 불리해졌다. 고구려 대무신왕은 적조를 받은 후 회신히기를: “흑색은 북방의 색인데, 현재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소. 또 적조는 서물(瑞物)인데 그대가 얻고 가지지 않고 내게 보냈소. 양국의 존망은 알 수없소이다. “ 이후 알다시피, 고구려는 부여의 강대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돌이켜 부여를 탄병(吞並)할 의도를 보였고, 부여는 수동적국면으로 떨어졌다.
고구려대무신왕4년(AD21), 고구려는 먼저 제압하려고 군을 보내어 부여를 공격하였다. 다음해 부여에게 대규모군사 행동을 전개하였다. 고구려군은 역불유수[逆沸流水(今渾江)]에 올라가서 부여의 영토에 진입하였다. 고구려군은 부여왕성 남쪽 경계로 진경할 때 부여왕은 전국군대로 전투에 나왔다. 격전중 부여왕대소는 전사하였다. 부여군은 이미 왕을 잃어서, 기력이 꺾이었지만, 굴복지 않았고, 몇겹으로 고구려군을 포위하여서 마침내 그들을 격퇴하였다. 다음 전쟁중에 부여는 비록 고구려의 침입을 격퇴하였지만, 많은 토지를 잃엏고, 손실이 거대하였다.
부여왕대소전사이후, 통치집단내부에서 왕위계승문제가 발생하여 격렬한 투쟁과 첨예한 모순이 발생하였다. 부여는 사분오열(四分五裂)로 향하여 달리기 시작하였다. 대소왕 아우는 대세가 이미 가버렸고 국가가 장차 망할것은 알아서 백여인을 이끌고 압록곡(鴨綠谷)으로 도주하여 그곳의 해두왕(海頭王)을 죽이고, 그곳 백성을 강제로 자기를 섬기라고 하고 아울러 역사수(易思水)가에 역사국(易思國)을 세우고 자칭 역사왕(易思王)이 되었다.
고구려태조대왕(太祖大王) 16년(AD68) 부여역사왕손자 도두(都頭)가 마침내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대소왕제는 달아난 후 오래지 않아서 부여왕종제(從弟)가 국인(國人)에게 말하기를 “나의 선왕은 몸이 망하고 나라는 깨어졌고, 백성은 의탁할곳이 없고, 왕제(王弟)는 도망하여 몸을 피하고, 나 또한 불초(不肖)라, 흥복(興復)할 도리가 없도다.
그리고 만여인(萬余人)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고구려는 그에게 왕을 봉하고 연나부(椽那部)애 보내고, 등에 낙문(絡文)을 주고 낙씨(絡氏)성을 주었다. 고구려의 이러한 정책으로 많은 부여귀족이 고구려에 투항하였고, 부여의 국력은 극히 약화되었다. 한단계시기 이후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는 사적(史籍)에 기재가 없다. 《후한서 부여전: 後漢書·夫余傳》기재하기를: 부여는…현토천리였으니, 곧 제3의 현토군이며, 현재 심양초종무백관둔(沈陽稍東蔔柏官屯)이니 알만하다. 부여는 이미 서천(西遷)하여, 현재 길림성서북부지구(吉林省西北部地區)이다.

 

 

中原王朝(중원왕조)

 

 

부여의 대외관계중(對外關系中)에 있어서, 같은 중원왕조(中原王朝的) 와의관계(中原王朝的關系)가 주요하고 또 가장 기본적이다. 부여건국후 중원왕조건립과 더불어 빈번하고 밀접한 관계를 이루었다. 중원문화의 영향을 받음은 비교적 깊었다. 부여인이 저두(姐豆)를 식용하듯이, 읍양승강등(揖讓升降等) 생활습속(生活習俗)이 한족과 더불어 접근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서 가쟈했듯이 “한대 부여왕장(夫余王葬)에 옥갑(玉匣)을 사용하고, 항상 미리 현검군에 지불하듯이 왕이 죽으면 받들어 장례하였다. 알려져있기를: 부여는 한조(漢朝)와 더불어 관계가 밀접하였다.
왕망시기(王莽時期)에 부여에게 또한 사신을 파견하였다. 건국원년(AD 9)에 왕망은 외이(外夷: 밖오랑캐)에 향하여 위력을 전시하고자 오위장(五威將)을 파견하여 사방에 인정하는 인(印)을 나누어 발부하였다. 《한서 왕발전: 漢書·王莽傳》기록하기를: 동으로 보낸곳은 현토, 낙랑, 고구려와 부여로 갔다.
。 소위 인끈(印緩)을 발부함은 즉시 부여왕을 왕으로 가봉(加封함이니, 인장을 수여했다. 건국4년(AD 12)에 왕망은 북노(北奴)세력을 축출하고자 고구려병사를 강제로 모집하여서, 오로지 이 병사는 변방에 나가서 죽었고, 법을 어긴자들은 도적이 되었고, 그들을 요서대윤전담(遼西大尹田譚)에 추격하였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이것이 왕망을 격노시켜서, 왕망의 장군 엄윤(嚴尤)은 아뢰기를, “초인[指高句麗朱蒙王]이 법을 어겼고, 법을 지키지 아니하니, 틀림없이 다른 마음을 가졌으니, 당연히 주군(州郡: 그지역)을 위문해야겠습니다. [宜令州郡且尉安之]
이 낭패에 대죄를 지었지만 반역이 두려워했고, 부여무리는 반드시 화해를 원했고, 흉노를 극복할 수없고, 부여와 예맥에서 일어나서 큰 근심이었다. “그러나 왕망은 간언을 듣지 않고, 고구려를 정벌하도록 엄명을 내렸고, 천하에 포고하며, 함(鹹)으로 알게하였다.” 이로부터 부여와 왕망신실(新室)은 관계를 단절하였다.
동한건무(東漢建武)25년(AD 49),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서 존경을 표시하니, 광무제는 후히 답하고 상을 내리고, 이리하여 동한사절단은 해마다 부여에 왔다. 한안제영초5년(漢安帝永初五年 AD 111)에 부여왕은 수차 변경을 침입하고, 보기(步騎) 7000-8000인을 이끌 AttachNo file chosen Drag and drop your files here, or Click attach files button. Allow Comments Allow Trackbacks Notification Public Tag: You may submit multiple tags by inserting commas(,) between tags. Copyright 2016, All rights Reserved. WWW.SNUMA.net (SNUMA) Seoul National University Medical Alumni Website Worldwide고 낙양군을 침범하여서 이민(吏民)을 살상하다가 후에 거듭 스스로 와서 복종하였다. 부여의 누차 군사행동으로 잠시 악화되었던 한조(漢朝)와의 관계였지만, 멀지 않아 쌍방이 우호관계를 회복하였다.
한조영령원년(漢朝永寧元年; AD120)에 왕자위구태(尉仇台)를 낙양에 보내어 조공하여, 한안제(漢安帝)는 위구태에게 금채(金彩)의 관인을 주었다. 한순제원화원년(漢順帝永和元年; AD 136)에 부여왕은 친히 겅사낙양(京師洛陽)에 와서 조공을 올렸고, 한순제(漢順帝)는 백희(百戲)를 설치하여 접대하였다.
한환제연희4년 (漢桓帝延熹四年)에 거듭 사신을 보내 조공을 보내고 축하하였다. 영강원년(永康元年)에 부여왕부태(夫余王夫台)는 2만여인을 이끌고 현토군(玄菟郡)을 침입하여, 현토태수공손혁(玄菟太守公孫域)을 격파하고 천여급을 참수하였다. 한영제희평3년(漢靈帝熹平三年)에 이르러 거듭 조공을 하였다. 부여는 본래 한대의 현토군(漢代的玄菟郡)에 속하였고, 한헌제시(漢獻帝時) 그왕은 요동군(遼東郡)에 귀속할 것을 청하였다.
안제영령원년(安帝永寧元年; AD120)에 사자위구태(嗣子尉仇台)를 보내어 이르러 조공을 올렸다. 이에 동한 안제는 위구태에게 금채인수를 주고, 우호를 보였고, 이후로 쌍방이 관계는 거듭 개선되었다.
위구태가 동한에 조공한후, 쌍방의 관계는 단순히 사신왕래와 대외무역의 범위를 초과하여, 심지어 군사상합작을 진행 하였다. 안제건광원년가을(安帝建光元年; 121年秋)에 고구려태조대왕졸마한(高句麗太祖大王卒馬韓)은 예맥일만 여기(濊貊一萬余騎)로 현검성(玄芡城)을 포위했을 때, 부여왕은 아들 위구태를 보내고 병사 2만을 이끌고, 주군병력과 함께 토벌하여 오백여급을 참수하였다.
익년(翌年: 다음해) 고구려, 마한 그리고 예맥은 요동을 침범했을 때, 부여왕과 파견병사는 한을 도와 격파하고 이들 군사가 합작하여 부여와 동한관계를 충분히 설명하게 되었다. 차후 부여와 동한은 계속 화평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더욱 순제영화원년(順帝永和元年; AD 136)에 부여왕이 친히 동한을 방문한 후, 그 우호관계는 진일보발전(進一步的發展)하였다. 부여왕의 경중(敬重)과 우호표시에 대하여, 부여왕이 귀국시 동한순제(東漢順帝)는 “황문고취(黃門鼓吹)와 각저희(角抵戲)를 특별히 저작하였다.
환제연희4년(桓帝延熹四年; AD 161) 부여는 계속 사자를 보내고 조공하였다. 멀지 않아서 쌍방관계에 긴장이 일어났다. 환제영강원년(桓帝永康元年; AD 167) 부여왕 부태가 2만여인으로 현원(玄冤)을 침범하였고, 현원태수 공손역(玄冤太守公孫域)이 격파하여 천여급을 참수하였다. 후에 쌍방관계는 또 정상을 회복하였다. 영제희평3년(靈帝熹平三年; AD 174) 부여왕은 부봉장공헌(復奉章貢獻: Contribution to the restoration chapter)을 올렸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부여와 동한은 어느정도 충돌이 발생하였지만, 동한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신하로서 예속되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동한말년 전체 중국의 형세가 거대한 변화를 형성하였다. 중원에서는 군웅할거(群雄割據: 여러 영웅(英雄)이 세력(勢力)을 다투어 땅을 갈라 버티고 있음.)하여 전란이 그치지 않는 상태였다. 동한왕조는 실제로 법을 유지하여 통치할 수없었다. 이때 부여의 서북변경에 새로운 변화가 발생하였다. 원요동태수공손도(原遼東太守公孫度)는 이 유리한 시기를 이용하여 다른 세력을 계속 배척하고, 자신의 세력을 확충하였고, 동북지역의 일인자로 엄연(儼然)하 이루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여는 중원과 내왕할 수없었고, 공손도의 건립관계에 동조할 뿐이었다.
공손도는 해동을 정복하고 외이(外夷)를 복종시켰고, 부여왕 위구태는 거듭 요동에 속했다. 이때 고구려와 선비는 강하여 부여로서는 이 두 종족사이에 끼어있었고, 그들의 종녀(宗女)를 처로삼았다. 후에 위장사마고(魏將司馬鼓)가 공손세력을 멸망시킨 후 부여는 뒤딸아서 조위(曹魏)건립에 관계하였다. 조위시기에 부여는 위정권건립에 우호관계였다.
위문제연강원년(魏文帝延康元年; AD 220) 3월 부여는 위를 향하여 사신을 보내고 칭신(稱臣)하며 조공을 받쳤다. 위제왕정시년간(魏齊王正始年間; AD 240-249) 유주자사관구검(幽州刺史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할 때, 현토태수왕원(玄冤太守王頑)을 부여에 보냈고, 부여왕은 왕궁밖 교외로 나가서 영접하였고, 군량도 공급하였다. 부여와 조위의 관계는 이렇게 긴밀하였다.
서진시기에 이르러 부여는 동이교위적관할(東夷校尉的管轄和保護)과 보호를 받았다. 진무제시(晉武帝時; AD 265-290) 부여는 항상 사신을 파견하여 진조에 조공을 받혔다. 그후 모용선비(慕容鮮卑)가 일어나기시작하여 동북을 지배하니, 부여의 존망에 직접 위협이 되었다. 태강6년(太康六年; AD 285) 모용마(慕容魔)는 병사를 일으켜 부여를 격파하였고, 부여왕은 근심속에서 자살하였고, 자제(子弟)는 옥저(沃沮)로 달아났고, 이후 모용마는 자주 부여를 침입하고 부여인을 노예로 삼고 중원에 팔았다.
진무제는 이일을 비상하게 중히 보았다. 그는 부여를 구하지 않은 죄명으로 호동이교위산어영(護東夷校尉鮮於嬰)을 파면하고 그리고 조서를 내려 가로되: “부여왕은 대대로 충효를 지켰는데, 악한 오랑캐에게 멸망을 당했기에 심히 괴롭도다. 만일 그 남은 무리가 족히 나라를 회복할 수있다면, 당연히 계획을 세워서 존립하도록 해야겠다.” 동시에 영을 내려서 노예를 잡아서 판 자들에게 팔려간 노예에 대하여 관물(官物)로 속환(贖還)하라,” 하고, 두 기주시(冀二州)에서 부여노예를 금하였다.
이리하여 부여는 진조의 방조하(幫助下)에 복국을 하였지만,이때 부여는 쇠약해졌다. 동진목제영화2년(東晉穆帝永和二年; AD 346)에 모용육파”세자정준(慕容毓派“世子丁雋)이 거느린 모용군, 모용석, 모여군(慕容軍、慕容惜、慕與根)등 삼장군과 만칠천기가 부여를 습격하여, 정준(丁雋)이 중앙에서 지휘하고 군사는 임락(任烙)이 결정하여 부여를 점령하고, 그왕 현과 부락 오만여구를 포로로 데리고 왔다. 선(銑)은 현(玄)으로 진동장군(鎮東將軍)을 봉하고 딸을 아내로 주었다. 부여는 일차로 심중한 타격을 받아서 이후 다시 일어날 수없었다.
4세기후반기에 고구려는 남으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고, 서쪽으로 요동군(遼東郡)을 점령하고, 국력은 강대하여졌다. 이에 공격하는 창머리는 부여로 향했다. 동진안제의희6년(東晉安帝義熙六年AD’410)에 고구려는 광개토왕이 친히 부여를 정벌하였다.
《好大王碑銘; 호대원비명》에 기재하기를, 광개토왕은 이전쟁중 부여에게 치명적타격을 주었고, 왕성을 점령하고, 공격하여 격파하기를 성64, 촌1400이었으며, 부여국 대부분강토는 고구려에 점령되었다. 부여는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그 정치중심은 북으로 이동하였다. 북위문성제태안3년(北魏文成帝太安三年; AD 457) 12월에 부여국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올렸으니, 이는 부여가 아직 존재할 뿐아니라, 또한 북위에게 확립된 신하로서 조공을 올리는 관계였다.
5세기말에 물길인(勿吉人)이 강대하여졌다. 《 위서 물길전:魏書·勿吉傳》에 기록하기를: “물길국과 사람들은 굳세고 거칠며, 동이중 최강이다.” 이 설명에서 물길은 이미 동북지구에 한가지 강대세력이 되었다. 북위초에 물길은 장광재령(張廣才嶺)을 건너서 서편으로 발전하고 부여를 공격하기 시작하여서, 원부여의 큰 토지를 점령하였다. 북위효문제시(北魏孝文帝時)에 물길은 부여를 쫓아내어, 부여왕은 아내를 데리고 남으로 달아나서, 고구려문자명왕 3년(高句麗文咨明王三年; AD 494)에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이에 이르러 부여국은 우리나라 동북에 존재한지 700여년후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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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 Ho Chung - June 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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