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4.02 14:08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아래는 줏어 들은 경상도 말로 번역한 버젼 (농담) 내 꼬라지 배기 실타꼬 갈라 카모 내 더러버서 암말도 안코 보내 주꾸마. 약산 강가 참꽃 항거석 따다 니 가는 길에 뿌리 주꾸마. 니 갈라카는 데마다 나뚠 그꼬슬 사부자기 삐대밟고 가삐라. 내 꼬라지 배기시러 간다 카몬 내 때리 직이 삔다케도 안 울낀 카네 괴 안타 고마가라. 편집자 노트: 김소월(金素月, 1902~1934)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평북출생이였다. 본인이 김소월의 홈페이지인 "http://www.koreandb.net/sowol/sowol_home.htm" 에서 자료를 모아 여기에 그의 짧은 인생의 여로를 올립니다. 조금 길지만 본인은 처음 알게된 이야기로 흥미있게 읽었읍니다. 아랫 사진은 본인이 찾을수있었던 유일한 사진입니다. 1902: 평안북도 구성군 구성면 왕인동 외가에서 9월 7일(음력으로 8월 6일) 태어나다. 1904:부친이 정주ㆍ곽산간 철도를 가설하던 목도꾼들에게 몰매를 당했고, 이로 인해 정신이상을 일으켜 죽을 때까지 폐인생활을 하였다. 한때 광산업에 종사하여 재산을 모으기도 했던 조부 김상도의 각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자라다. 1905: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조국이 식민지화의 길로 치닫게 되다. 이 때를 즈음하여, 유학과 한문에 소양이 높은 할아버지의 훈도 밑에서 구학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수많은 민담ㆍ민화 등을 들려주었던 숙모 桂熙永이 숙부 應悅에게 시집옴으로써 소월은 그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되다. 1909: 남산보통학교(일설에 의하면 사립학교)가 설립되자 머리를 깎고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다. 아버지의 정신병으로 인하여 집안은 더욱 쪼들리게 되었으나 할아버지의 훈도와 할머니 어머니의 지성어린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하다. 1914: 연변ㆍ북한 쪽 자료에 의하면, 이 시기에 <긴 숙시(熟視)>를 썼고 이것을 후에 《근대사조》(1호,1916)에 발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15: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다. 5월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안서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다. 이 때 소월시의 원천(源泉)이 된 한시ㆍ민요ㆍ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6: 세살 많은 홍실단(일명 丹實) 여사와 결혼하다. 연변ㆍ북한 자료에 의하면, 남산학교를 졸업한 후집에서 쉬다가 이 시기에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하여 시를 짓기 시작했고, <먼후일>을 썼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19: 북한 자료에 의하면, 동급생을 선동하여 이들과 함께 3ㆍ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잡혀가던 도중에 요행히도 몸을 피하였다고 한다. 4월에 <춘조>를 탈고하다. 1920: 이 시기에 <그리워>(창조 5호, 1920. 3) 등과 <거친 풀 흐트러진 모래동으로>(학생계 창간호, 1920.7)를 발표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하다. <춘조>를 《학생계》(3호, 10)를 발표하다. 1922: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하다. 동급생에 나도향이 있었고 한 반 아래에 박팔양이 있었으나 특별한 교우관계를 갖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ㆍ1운동 이후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느낌을 주는 <함박눈>(개벽 28호, 10)을 발표하다. 1923: 배재고보(7회)를 우수한 성적으로(총 44명중 4등) 졸업하다. 고향에 돌아와 평북 정주군 림포면 사립학교 교원이 되다. 아동교육에 종사하면서 시창작에 정진하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서정시를 창작하고, 그것들을 《개벽》 등에 발표하다. <장별리>도 이 때 지은 작품이다. 사립학교 교원생활이 창작이나 집안살림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이 시기에 집안이 더욱 피폐해져 가다. 처가의 도움으로 일본 동경에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하다. 학자금이 제대로 조달되지도 않았고 상과에 취미도 없어 괴로운 학창생활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하여 10월경 귀국하다. 이즈음에 서울생활을 하게 되고 나도향 등과 어울렸던 것으로 보이며, 이 때의 서울생활의 느낌을 시로 읊은 것이 <서울밤>과 <不稱錘秤> 등이 아닐까 추측된다. 1924: 김동인 김찬영 주요한 김억 전영택 김유방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가담하여 서울에 체류하였으나, 곧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방현)에서 사망할 때까지 동아일보 지국일을 맡아보며 소일하다. 그러나 《東亞日報社史 1》의 기록에 의하면 소월이 동아일보지국장 일을 맡기 시작한 것은 1926년 8월부터이고, 그만둔 시기는 927년 3월이다. 1925: 유일한 시론 <詩魂>(《개벽》59호, 5)을 발표하고, 이해 말에《진달내》(12)을 매문사에서 상재. 1934: 6월 사남 낙호가 출생하다. 1934: 12월 23일(일설에 의하면 24일)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 자택에서 사망/자살하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마약 중독으로 추정된다. (편집자 note: 소월이 장기 마약 중독자였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아편을 자살의 도구로 한번 쓴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조선중앙일보》(12.30)에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씨의 돌연사망 기사가 났고, 《동아일보》(12.30)에 소월의 사망을 알리는 기사와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찍은 흐릿한 소월 사진이 소개되다. 소월은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터진고개에 묻히다. 1935: 김기림 김동인 김동환 김억 이광수 이은상 유도순 박종화 박팔양 정지용 등 문인 백여명이 서울 종로에 있는 백합원에서 소월을 추모하는 모임을 가지다. 안서가 《조선중앙일보》(1.22-26)에 <요절한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을 쓰고, 이어 《신동아》(2)에 소월을 추모하는 <弔詩>를 발표하다. 김억이 쓴 <요절한 박행시인 김소월에 대한 추억(3)>(《조선중앙일보》 1.23) 본문에 소월의 친필이 소개되다. 1939: 《여성》에 소월의 <박넝쿨타령> <성색> <세모감> <술과 밥> <절제> 등 유고 시편이 발굴되어 발표되다. 김억이 박문서관에서 《소월시초》를 펴내다. 소월의 묘를 서산면 왕릉산으로 이장하다. 1956: 정음사에서 《소월시집》이 간행되다. 1966: 백순재ㆍ하동호가 양서각에서 《못잊을 그사람》을 펴내다. 이 시집은 200여 편의 소월시를 원본과 대조하는 작업을 보여주어 소월시 전집 발간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된다. 1968: 3월에 한국일보사에서 한국신시 60년 기념으로 서울 남산 시립도서관 앞에 金忠顯의 글씨로<산유화>를 새겨넣은 소월 시비를 세우다 1975: 배제 38회 졸업생인 소월을 기리고자 배제고교 동창생들이 6월에 <진달래꽃>을 새겨넣은 소월시비를교내에 세우다. 1977: 《문학사상》(11)에서 소월의 육필유고를 발굴하여 《미발표 소월 자필 유고시집》을 게재하다. 1978: <봄의 맘> 등 50여편의 육필유고인 <주인없는 노래>가 '소월의 작품인가, 안서의 작품인가'라고 《문예중앙》(봄호)에서 문제를 제기하다. 문학사상사에 의해 소월의 초상화가 완성되어 문인들에게 배포되다. 1980: 김종욱이 홍성사에서 《원본 소월전집(상 하)》를 펴내다. 이 시집에서 소월의 육필원고가 하권 첫부분에 영인되어 공개되다. 1986: 문학사상사에서 소월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윤주은이 교문사에서 《밧고랑우헤서-김소월시전집ㆍ평론》을 펴내다. 1990: 한국문인협회 주최로 동방플라자미술관에서 [한국근대작고문인 유묵ㆍ육필 100인전(1990. 2. 5 - 2.10)이 열린 바, 김소월의 <무제> 일부가 그의 육필 유고로 공개되다. 문화부 주관 한국인 재발견운동--9월의 문화인물로 김소월이 선정되다. 한국역사인물보존회에 의뢰하여 소월의 초상화를 제작한 바, 컴퓨터 토탈 스캐너(Computer Total Scanner)를 이용하여 1934년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과 그의 삼남 김정호, 손자 김영돈의 모습을 참조하여 소월의 인물화를 완성하다. 조각가 최만린이 소월흉상을 제작하다. 시화전 및 한풀이 공연이 문예진흥원 마로니에 광장에서, 김소월 가곡의 밤이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김소월 관련 자료 전시회가 교보문고에서 열리다. 김소월 특선 가곡집이 서울음반에서 카셋으로 제작되다. "素月의 詩 읽기" 편집자의 군소리: 본인은 중학교때 부터 소월의 시를 처음 알고 사랑했었지요. 아마 누구나 다 그랬었을 겁니다. 그나마 짧었든 소월 시인의 현실이 너무 불행했던겄 같읍니다. 불과 32 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그처럼 아깝고 잛은 인생이 서럽군요.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영원할것임이 틀림없읍니다. 위에 써있는것 같이 그가 떠난후에 남은 사람들이 그를위하여 한일들을 보시면 아시겠죠. 인생의 가치를 死前과 死后를 합쳐서 생각한다면 素月의 인생은 결코 불행했던것이 아니고 찬란했던거라 할수있겠죠. |
2005.04.02 14:12
2005.04.02 16:37
2005.04.03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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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utiful poem of our native poet, supported by the humorous version by our dear friend,
Dr. Hwang. What a good reward for me by my good friends. As I was reading the above,
I can't help but reminding myself how lucky I am when compared to our celebrity, posthumous,
Mr. Kim Sowol. One thing, he lost his beloved country, Korea. The second thing, he didn't have
the financial well-being we have. I have to feel sorry for him. We certainly must admire his
courage under the terrible conditions and his ability to write such beautiful, timeless poems.
I learned quite a bit about him thanks to Steven's effort. Now I have a homework to do, i.e. read all the poems by Sowol listed above. Thanks, Stev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