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4.10 09:40
오 세 윤 설거지를 끝낸 주호가 방으로 들어서면서 털썩 내 던지는 소리가 뜬금 맞다. 여름방학이 되면 한 사흘 고향집에 다녀오고 나서 바로 영육원엘 들어갈까 생각중이라며 내 속을 뜬다. 영육원 소리는 학기 초부터 벌써 지방에서 올라온 우리들 사結?관심거리 화제로 떠돌고 있었다. “괜찮대?” “응, 박석배라고 국어선생님 동생이 1학년에 있지 않아? 녀석이 나랑 유도부에 한반인데 한 달 전에 거길 들어갔다는 거야, 좋대.” “왜, 걔는 집도 서울이고 부모가 다 살아 계실 텐데?” “잘 몰라, 무슨 사정이 있나보지 뭐” 주호는 뚤 꺽 입을 다물어버리고 만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래도 평소 남의 사사로운 사정은 말을 잘 안 하려고 했다. 말수도 적었다. 어쩌다 고향이나 어머니이야기가 나올 때에만 잠시 얼굴이 어두워질 뿐 감정의 기복을 밖으로 나타내는 법이 없었다. 빠끔하게 뚫어진 창문으로 여름날의 저녁이 어느새 저뭇하게 하루를 끝내고 있었다. 주호가 더 이상 마다하면 상민이도 주호의 의사를 따라 자취를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다. 지방학생이라고 다 어려운건 아니어서 함께 자취할 친구도 별로 없거니와 주호만큼 동료를 배려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과묵한 친구도 구하기 쉽지 않았다. 상민이야 1.4후퇴 때 부모와 헤어져 이제껏 행방을 모르는 고아라서 그래도 고아원을 찾아 들어가면 되었지만 주호는 고향에 어머니가 계셔 그도 쉽지 않았다. 하긴 고아원의 환경은 공부하기에 그리 적당치도 않았다. 짐작은 하면서도 상민은 주호에게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 가르치기가 힘들어서 그래? 아니면........” 주호와 상민 둘 모두 인근의 초등학생들을 모아 과외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시간을 너무 뺏겨, 학교까지도 왕복 시간 반이 걸리는데 밥해 먹으랴 가르치랴 공부할 시간이 너무 없어. 이제 2학기 들어가면 이과 문과가 나뉘어 본격적으로 대학진학 준비를 하게 되는데 마음이 급해.” 주호가 심각하게 이마를 찌푸린다. 상민도 동감이었다. 하긴 입학하는 날로부터 1년이 훨씬 넘게 해온 자취생활이 지겹기도 했다. 어떤 때는 1주일, 아니면 하루씩 교대로 식사당번을 했다. 아침을 해 먹고 나서는 시간이 빠듯해 대부분 찌개냄비고 밥솥이고 그대로 두고 학교로 갔다. 돌아와서도 냄비는 씻는 법이 없이 고추장만 조금 더 풀어서 두부를 넣고 끓이기가 예사였다. 시험 때가 되면 밥을 못했다. 아침은 나가다 가게에 들러 팥빵 두개씩을 사서 아침으로 하나, 점심에 하나를 먹고 물을 마셔 적당히 배를 달랬다. 하교 길에는 왕십리 역전 리어카아저씨 가게에서 호떡 5개씩으로 저녁을 때웠다. 싼값에 싸라기 쌀을 샀다가 일어도일어도 돌이 골라지지 않아 혼이 난 뒤로는 보리를 섞을망정 쌀은 제 것을 사 먹었지만 19공탄만은 만만치가 않았다. ‘삼천리’나 ‘대성연탄’이 좋기는 했지만 값이 비쌌다. 낱장으로는 잘 팔지도 않았다. 값싼 사제연탄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몇 장씩 낱개로 사다 때기에도 편했다. 하지만 문제가 많았다. 어떤 때는 너무 쉽게 타 학교를 다녀오면 꺼져있기 일쑤요, 또 어떤 것은 흙이 너무 많이 섞여 아예 불이 붙질 않던 가 화력이 약했다. 타다말고 중간에 꺼지는 수도 자주 있었다. 속이 상하다 못해 꺼내내어 무자비하게 짓밟아버리는 걸로 분풀이를 하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이른 봄의 일요일, 하루는 큰맘 먹고 ‘대성연탄’ 50장을 들여다 처마 밑에 쌓아 놓고 다음날 학교에 간적이 있었다. 부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대문을 들어서다 보니 쌓아놓은 연탄은 낮에 내린 보슬비에 맥없이 무너져 내려 흉측한 검은 석탄더미로 변해있었다. 가슴도 석탄더미처럼 시커멓게 내려앉았다. 마당으로 흘러내리는 새까만 연탄 풀어진 물을 주인아주머니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영육원이 정확히 어디래?” “응, 시립농대 뒤 중랑천 못미처래.” “제법 머 네.” “통학 거리만 20분 늘어날 뿐이야, 그것도 전차를 타면 오히려 왕복 50분이 절약돼.” “들어가긴 쉽대?” “그럼, 재학 증명서만 있으면 된대.” “아이들 가르치는 건?” 주호는 가만히 상민이의 눈을 응시하면서 당연한 듯 말했다. “그거야 그냥 해야지 뭐, 대신 전차를 타자.” 돈이라면 단돈 10환이라도 아껴야만 할 처지였지만 시간은 더 한층 소중한 금싸라기임을 둘은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육아원에 들어가는 건 그 밤으로 의견일치를 보았지만 실제로 입원한 것은 새 학기가 시작되고도 2주일이 지나서였다. 포장도 되지 않은 언덕진 길옆에 영육원이 있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만한 좁은 길 너머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중랑천이 흐르고 있었다. 시멘트 불록으로 지은 2층 건물은 바닥면적이 60평은 실히 됨직 넓어 보였다. 각 층마다 중간 높이로 엉성하게 칸을 막아 한 칸에 2명씩 한 층에 도합 20명을 수용했다. 책상 하나와 야전침대, 그리고 담요가 두 장씩 주어졌다. 11월에 들어서야 담요가 한 장 더 추가로 지급되었다. 식사도 간단했다. 보리밥 한 그릇에 깍두기 한 종지, 그리고 고추장과 치즈가 한 조각 나왔다. 겨우내 단 하루도 옷을 벗고 자본적이 없게 방은 추웠다. 겨울에도 빨래는 중랑천에 나가 살얼음을 깨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공부를 하려는 아이들이 모여 있어 경쟁도 되었거니와 주변이 조용해 공부를 하기에는 마침맞게 좋았다. 흡족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공짜로 먹고 자고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고마웠다. 공부가 참으로 하고 싶었다. 1.4후퇴로 식구들이 타고 내려오던 트럭이 논산에 잠깐 머문 사이 상민은 소변이 급해 말도 않고 차에서 뛰어내려 골목으로 치달았다. 밀려 내려오는 차들과 피란행렬로 차를 타는 것도 지루해 식구들 모두 파뿌리처럼 지쳐있었다. 낮 시간임에도 깊게 잠에 골아 떨어져 누구하나 깨우기가 미안했다. 가시철망 안쪽은 마침 학교 운동장이었다. 전봇대는 골목 안으로 한참을 들어가 있었다. 볼일을 마치고 얼굴을 들어보니 운동장에는 외국군인들의 텐트가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터키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군인들이 나와 저녁준비를 하고 있었다. 군인 하나가 닭을 잡았다. 서양 사람도 칠면조가 아닌 닭을 먹는가싶은 호기심에 보고 있으려니 털을 그냥 둔 채 진흙에 싸서 불이 활활 타는 드럼통 화덕에 그대로 쑤셔 넣는다. 구경하고 있는 상민을 발견한 병사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제 서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겁이 더럭 났다. 뒤돌아 차가 있던 데로 달려 왔으나 그곳엔 이미 차도 식구들도 부모님도 아무도 없었다. 그 앞 정육점 아저씨에게 물었다. 잘은 모르지만 길 따라 전라도 쪽으로 갔을 거라고 했다. 옆에 있던 할아버지 한분이 직접 보기라도 한 듯 다른 말을 했다. “아니여, 예로부터 정감록에 계룡산 아래가 피란 골이라고 했느니. 내가 몇 사람한테나 일러줬구먼, 내말 듣고 그리 간 게 확실허여. 암 확실허고 말고, 싸게 쫓아가 봐.” 더 지체치 아니하고 그길로 청양을 간다는 트럭을 얻어 타고 상민은 공주로 갔다. 공주는 그리 넓지 않았다. 전쟁 통일망정 충청도의 인심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밥을 빌어먹으며 계룡산 아래까지 보름을 찾아 헤맸지만 식구들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청양으로 대천으로, 헤매고 헤매면서 피란민 수용소가 설치돼있다는 홍성까지 왔다. 부모와 식구들은 이곳에도 없었다. 지쳐서 더는 갈수도 없었고 갈 곳도 없었다. 피란민 임시 수용소에 기거하며 일할 만한 곳을 찾았다. 읍내에 있는 피란민사무실은 경향신문 지국을 겸하고 있었다. 소장을 겸한 지국장이 상민을 보더니 신문을 돌리라고 했다. 몇몇 아이들은 신문을 받아 팔았다. 반년이 지나자 대부분의 피란민들은 그런대로 자릴 잡아 떠나고 수용소는 날이 갈수록 썰렁하게 비어갔다. 설치된 지 일년 만에 문을 닫았다. 상민은 어디라 갈 곳이 없었다. 신문사 사무실에 묵을 수도 없었다. 소장이 월급으로 주는 보리쌀 두말의 배급표로는 생활이 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말을 듣고 상민은 버스 차부로 갔다. 차부의 함석지붕 아래에는 다락방이 있었고 공원에게는 식권이 주어졌다. 점심은 없었다. 온 종일 기름칠을 하며 상민이 하는 일이란 엔진 보링의 마무리 손질이었다. 발브를 이용해 피스톤 구멍을 가는 일이었다. 여름의 긴 해에 배고픈 날이 많았다. 버스 차부에 있으면 혹시 부모님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기대도 해 보았지만 그런 행운은 끝내 상민이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친구들이 생겼다. 서울에서 피란 내려와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방과 후 신문팔이하던 신규와 토박이 운표, 고모의 양복점에서 심부름하며 혼자 사는 태천이를 사귀었다. 태천이도 부모가 없었다. 9.28 수복 때 아버지가 납북되고 피란길에서 계모인 어머니와도 헤어져 고모를 찾아와 산다고 했다. 운표만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여동생과 함께 남의 묘실에 살고 있으면서 신규처럼 신문팔이를 하고 있었다. 홍성에 아무런 연고가 없기로는 상민이 단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는 본고장 아이들이거나 최소한 외삼촌이래도 한집쯤은 친척이 있었다. 하루는 운표가 상민이를 찾아왔다. 운표가 말했다. “너 여기가 좋으냐? 뭐 좀 배울만한 게 있어?” “별로야, 기술은 안 가르쳐주고 매일 뻬빠질 만 해” “월급은 주냐?” 딱하다는 투로 운표가 연이어 물었다. “조금 주긴 하는데 점심 값도 안돼”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상민을 쳐다보던 운표가 준비했던 듯 뜻밖의 의견을 꺼낸다. “야, 이거 집어치우고 나랑 같이 구두 닦기 하자. 여기는 아직 구두 닦는 애들이 없어 수입이 괜찮을 것 같아. 온양에 가 보니깐 몇이 있는데 다들 바쁘더라구.” 제안이 솔깃했다. 하지만 상민은 숙소가 걱정이었다. “여길 관두면 잠은 어디서 자고?” “그건 염려 마, 산막에 방이 하나 남는 게 있어. 거기서 자면 돼.” 다음날로 차부를 그만두고 산막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일본 적산가옥의 울타리 판자를 몰래 뜯어내 구두통을 만들어 둘은 슈샨 보이가 됐다. 자초지종을 들은 태천이가 양복점 안에 있는 자기 방에 함께 있자고 제안해 다시 그곳으로 옮겼다. 할아버지와 그의 여동생이 있는 산막보다는 태천이의 방이 훨씬 드나들기 자유로워 마음이 편했다. 혼자 몸이긴 했지만 무덤 옆에 산다는 건 아무래도 마음이 썩 내키지가 않았었다. 하루에 열다섯에서 스무 켤레를 닦으면서 의식이 해결되자 상민은 자신의 장래를 심각하게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어떻게든 공부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을 다시 만나도 떳떳할 수 있으려면 명문학교의 어엿한 학생이 되어있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더라도 당당한 남자로 크려면, 그래서 험한 세상을 헤치고 떳떳하게 살아 나가려면 어떻게든 공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에 밤잠마저 설쳤다. 피란 나오기 전인 초등학교 5학년 때, 책상위에 교과서를 펼쳐놓고 ‘무쇠 탈’이니 ‘8.13의 비밀’이니 ‘성냥 파는 소녀’ ‘프란다스의 개’등을 넋 빠지게 보는 상민을 어머니는 조근 조근 그러나 엄하게 타이르시고는 했다. “책도 좋지만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된단다. 너 문간방 작은 삼촌 좀 봐라. 학생 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게으름만 피우더니 어른이 되어서도 취직도 못하고 저게 뭐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깐 저 꼴로 문간방에 얹혀 남의 눈치나 보며 살지 않냐, 너도 저렇게 될래?”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가 했다. 공부하라고 괜히 하는 말씀으로만 못마땅하게 듣고 귓등으로 흘렸다. 지금 와 생각하니 귀가 아프고 가슴이 쓰렸다. 어머니가 못 견디게 그리웠다. 눈물이 났다. 어떻게든 공부를 해야 했다. 하고 싶었다. 토요일 오후, 법원 앞을 지나는데 검은 가방을 든 신사가 나를 불렀다. 구두를 닦자고 했다. 작은 키에 비해 구두의 볼이 유별나게 넓었다. 구두 통 위에 올려놓은 오른쪽구두를 닦고 왼쪽을 바꿔 올려놓게 했다. 양말 보호용 곽 떼기를 빼어 끼우면서 잠깐 어깨를 피고 쉬려는데 학교를 파한 중학생들이 길을 지나가는 게 보였다. 무어라 떠들고 장난들을 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떼가 몰려가고 있었다. 그 뒤로 책가방을 든 여학생 둘이 재잘대며 길의 갓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동생이 생각났다. 매양 싸우기만 하던 두 살 터울의 동생이 보고 싶어 가슴이 쓰렸다. 책가방을 든 모습이 그처럼 부러울 수가 없었다. 상민은 구두를 닦는 것도 잊은 채 넋을 놓고 멀건 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리던 손님이 조용히 물었다. “왜 그러냐?” 깜짝 정신이 돌아와 다시 고개를 숙이며 구두를 문질렀다. “아녀요, 죄송해요 아저씨.” 신사가 지나가듯 다시 물었다. “아는 애라도 있었냐?” “아뇨.” “말씨가 서울 말씨구나, 피란 왔냐?” 신사는 은근하게 물었다. “네.” 상민은 짐짓 아무렇지도 안은 체 대답을 했다. “너처럼 노는 애들이 많으냐?” “네.” “공부하고 싶으냐?” “네” 구두를 닦고 난 신사는 거스름돈을 챙겨 그곳을 떠났다. 그해 가을부터 상민은 장돌림으로 업종을 바꾸었다. 구두를 닦다 잘못해 양말에다 구두약이라도 묻히게 되면 손님들로부터 심하게 야단을 맞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못 견디게 그리웠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구두를 닦지도 않았으려니와 그런 호된 꾸지람도 당할 리가 없었을 터였다. 구두닦이는 장래성이 없었다. 공부를 못할 바엔 장사라도 해서 돈을 벌자고 마음을 돌렸다. 돈을 벌면 나중 커서라도 공부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짧은 판단에서였다. 어려운 길을 피하려는 게으른 도피욕은 아닐까도 생각은 했지만 지금의 여건에서는 공부를 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만 같았다. 점점 더 불가능하게만 보였다. 좀 더 쉬운 길을 택하고 싶었다. 야간대학도 있다고들 하지 않던가! 장날이면 떡 전 거리 끄트머리에 있는 국밥집으로 가서 국수를 사먹었다. 6.25 전란 전, 서울에서 살 때 어머니는 자주 국수를 말아 끼니를 대신했다. 나나 동생이나 둘이가 다 맛이 없다며 무척이나 먹기를 싫어했다. 똑같은 그 국수 맛이 지금 여기서는 그렇게도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국수를 먹으며 내내 어머니를 생각했다. 다음해 4월 초, 저녁을 먹고 혼자 수요예배를 다녀온 태천이가 몹시 흥분한 얼굴로 뛰다시피 방으로 허겁지겁 들어왔다. “감리교회에 야간 중학교가 생겼대, 벌써 1주일 됐다더라.” 급하게 한마디 하고는 숨이 찬지 앞에 놓인 냉수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뭐? 정말이야? 누가 그래?” “문규가 그래, 지는 벌써 등록 했대” “나쁜 놈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글쎄말야. 평소에도 샘이 많더라니......” 태천이가 대신 미안한 듯 말끝을 흐렸다. 다음날로 둘은 야간학교에 등록을 했다. 학교이름이 화랑고등공민학교였다. 교회 내 유치원 건물에서 수업을 받았다. 주간 중학교의 선생님들이 봉사 겸 작은 보수로 나와 아이들을 가르쳤다. 놀랍게도 교장 선생님은 지난 늦여름 법원 앞에서 구두를 닦던 검은 가방의 바로 그 신사였다. 자랄 때 물지게를 하도 많이 져 키가 크지 못하고 발바닥이 넓어졌다며 우스개 비슷 말하면서도 한편 교육의 필요성을 강하게 역설하던 분, 고학으로 입신한 전설적인 인물, 지방법원의 지원 장 김영호 판사였다. 남녀 합해 47명, 대다수가 관공서의 급사이거나 아니면 빵구 집 공원, 가게 점원으로 학령을 넘긴 아이들. 책상도 없는 마루바닥에 엎디어 열심히 배웠다. 간데라 불빛 흔들거리는 칠판글씨를 하나도 빼지 않고 몽땅 먹으려 기를 썼다. 상민이의 성적은 월등히 뛰어났다. 1학년이 끝날 무렵, 교장 김 판사가 따로 상민을 불렀다. 의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장선생님한테 불려 갈만한 잘못은 저지른 적이 없었다. 공연히 떨렸다. “석 상민 학생인가?” “네, 선생님” 상민은 주눅 들어 대답했다. “석 군, 자네 주간으로 가서 정식으로 공부할 생각 없나?” 교장선생님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학생들의 나이가 많아서인지 아니면 정식으로 교단에 선 적이 없어서인지 김 판사는 어느 누구를 봐도 하대하지 않았다. “네?” 상민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여기도 좋지만 주간으로 가서 우수한 다른 학생들과 경쟁하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되는데?........” “하지만 전 부모도 없고....... 학비도,.......” 교장선생님은 모든 걸 알아보고 신중하게 결정한 일이라며 차근차근 하나하나 설명을 해나갔다. “지난봄에 고운표군을 주간학교 소사로 취직시키면서 여분의 학교 관사를 쓰도록 그곳 교장님한테 양해를 구했었지. 남는 방 하나는 자네가 쓸 수 있게 했네. 학비와 생활비는 걱정 안 해도 되도록 조치했으니 2학년부터는 주간으로 가게” 고마움과 기쁨으로 목이 메었다. 운표야 기왕에 피란민 사무실에서부터 알던 사이요 지금도 야간학교를 함께 다니고 있지 않은 가! “고맙습니다, 선생님.” 인자하게 웃으시다 말고 교장선생님은 다시 말씀을 하나 더 보탰다. “대신 나에게 약속을 하나 해 줘야겠어.” “네? 네.” 얼떨결에 대답했다. 모르긴 해도 공부 열심히 하란 말씀이겠거니 상민은 속으로 혼자 짐작을 하며 덤덤하게 선생님의 말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맘 편하게 먹고 자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는데 무슨 약속인들 못하랴 싶었다. 교장선생님은 진짜 판사처럼 엄숙하게 말했다. “세상에는 하기 쉬운 것과 하기 어려운 것이 있게 마련이야, 하고 싶은 것이 있고 하기 싫은 것이 있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경우에도 싫든 좋든 해야만 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라는 걸세. 어때, 약속할 수 있겠나?” 말을 마친 선생님은 상민에게 예금통장 하나를 건네주었다. 인사를 하고 나오면서 상민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는 속담의 의미를 실감나게 느꼈다. 겨울이면 함석지붕인 관사의 건너 방은 손도 내밀지 못하게 추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공부를 했다.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을 때도 이불을 둘둘 감고서야 앉아 글씨를 썼다. 나중엔 솜이 뭉쳐 이불구실도 제대로 못할 지경으로 넝마가 됐다. 아침에 일어나면 잉크마저 얼어있고는 했다. 유일한 재산 목록인 파카 만년필은 가슴에 품고 잤다. 새벽 3시까지 공부하는 건 기본이었다. 공부하다 졸리면 문을 열고 나가 50여m 떨어진 둔덕 위 반장네 집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방에 불이 켜져 있으면 다시 들어와 공부를 계속했다. 불 꺼진 다음 30분을 더 하고 잤다. 우울하거나 슬픈 생각이 들 때마다 상민은 책을 봤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책부터 샀다. 나중엔 슬플 겨를이 없도록 죽자하고 공부에 매달렸다. 남 앞에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반장은 상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관심도 보이지 않고 무얼 물어도 똑 부러지게 일러 주지도 않았다. 야간학교에서 온 고아인 주제에 제까짓 게 공부를 해야 얼마나 잘하겠느냐고 비아냥하는 말을 신규를 통해 듣고부터 상민은 실력으로 반장을 이겨야 하겠다고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주간에 오고부터 일요일이면 상민은 태천이가 다니는 성결교회에 그를 따라 나갔다. 예배가 끝나고 태천이는 자주 자장면을 사줬다. 곱빼기도 모자라 군만두까지 시켜 먹었다. “어때, 운표네는 지낼만해?” “괜찮아, 불편한건 없어. 좀 추워서 그럴 뿐이야” “왜, 불을 안 때줘?” “아 운표가 급사봉급 받아 사는데 땔감이 어디 그리 충분할 수 있겠어? 아궁이도 밥 할 때나 겨우 불 맛을 보는 것 같던데 뭐.” “학교 아이들은 어때?” 친구이긴 하지만 태천이는 그나마 상민이보다 두 살이 위라고 여러 가지가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다른 애들은 괜찮은데 반장 녀석이 좀.........” “왜, 널 괴롭혀?” “아냐, 날 무시해. 지 놈도 평안도에서 피란 나온 놈이, 꼭 멸치대가리처럼 생겨 가지고선,” “내가 혼 좀 내 줄까?” “관 둬, 조막만한걸 손보긴 어딜 손봐, 실력으로 누르면 돼” “그래 그게 젤이야, 네 말이 맞다. 주먹으로 해결하려면 한이 없지.” 태천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 판사 같은 고마운 분이 있는 외에도 태천이 같은 친구가 있어 홍성은 상민이에게 있어 고향같이 정겨운, 나중까지도 그리운 고장이 될 수 있었다. 기말시험에서 상민은 전교 2등을 했다. 어느 누구도 더는 상민을 업신여기지 못했다. 졸업을 하고 상민은 고등학교를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있어야만 어떻게든 부모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골에 있으면서 더 이상 김 판사에게 신세를 질수도 없다는 남자의 자존심도 한몫을 했다. 서울에 올라오는 길로 바로 살던 동네를 찾아갔다. 전쟁 통에 폐허가 된 영등포 역전 동네는 집들이 모두 새롭게 지어져 완전히 딴 동네가 되어 있었다. 식료품을 팔며 살던 옛집은 위치조차 찾을 수 없었다. 광복이 되어 부모님은 달랑 우리 남매만을 데리고 38선을 넘어와 서울은 물론 남쪽 어디에도 친척이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모의 행방을 알아볼만한 곳은 남한 천지에 한군데도 없었다. 다니던 초등학교에 갔다. 전연 낯이 설었다. 폭격으로 완전히 불타버려 학적부도 없다고 했다. 교사 건물도 모두 새로 지었다고 했다.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을 찾았다. 불행히도 납북되셨다고 했다. 부모님이 분명히 학교를 찾아오기는 했으련만 어디에도 남아있는 기록이 없었다. 성민은 주호를 만나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초등학생을 가르치며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했다. 1학년 내내 주일이면 노량진 교회에 들러 예배를 보고 나서는 영등포로 갔다. 골목골목을 돌며 한나절을 보내다 해거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추석이 돌아왔다. 영육원에서는 식사에 곁들여 삼겹살과 막걸리를 냈다. 호기심과 들뜬 기분으로 거푸 두서너 잔씩을 마시더니 취기가 오르면서 언성들이 높아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냥 그 자리에 벌렁 눕거나 아니면 자기 방을 찾아 들어 침대에 쓰러져 코를 골았다. 얼마를 지났을까, 누군가 상민을 흔들어 깨웠다. 석배였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술이 확 깨며 정신이 번쩍 났다. 황급히 물었다. “왜? 왜 그래, 무슨 일이 났어? 누가 싸워?” “주호 형이 언덕에서 막 울고 있어, 달래도 소용없어. 형이 좀 가 봐” 상민은 곧바로 달려갔다. 주호가 길 위에 두 발을 벌려 뻗고 퍼질러 앉아 언덕위로 떠오른 둥근 달을 향해 무어라 외쳐대며 검은 소나 된 것처럼 꺼이꺼이 소 울음을 울고 있었다. “어 머 니, 어 머 니~ 순네야~, 순네 야아~” 쟁반 같은 보름달, 경사진 하얀 신작로에는 달빛이 흐벅지게 쏟아져 내려 마치 고향의 너른 내를 흐르는 봄물처럼 넘실넘실 환하게 흘러넘치고 있었다. 황소처럼 꺼이꺼이 우는 주호의 곁에 서서 상민은 그를 달래고 싶지 않았다. 상민도 달빛 속을 떼굴떼굴 구르며 한바탕 주호처럼 울어보고 싶었다. 달을 쳐다보았다. 달 속엔 어머니가 보였고 동생 진숙이가 보였고 아버지가 보였다. 정월 대보름날 밤 사직공원 위 활터에서 함께 깡통에 불을 피워 돌리던 아이들이 보였고 화로에 인절미를 구워주던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엷은 회색구름에 잠깐 가렸다 다시 얼굴을 내민 달에는 더 이상 아버지도 어머니도 동생도 아이들도 없었다. 달은 무심히 푸르기만 했고 밤은 환하게 깊어만 가고 있었다. 궁금했다. 주호는 고향에 어머니가 계시다고 했는데 왜 어머니를 부르며 울었을까? 순네는 또 누구일까? 다음날 학교가 파하고 돌아오면서 주호에게 물었다. “순네가 누구냐?” 주호가 깜짝 놀라며 되묻는다. “뭐? 내가 순네라고 그러데? 참 나두, 취해서 정신이 없었나보네.” “누군데 그래?” “응, 순네가 아니고 순례야. 이따 밤에 얘기해 줄게” 주호가 멋쩍게 씩 웃으며 대답을 미룬다. 토요일이라 퇴근길의 전차 안은 발 디딜 틈도 없게 붐볐다 “밤에 언제?” “공부 다 하고 자정쯤, 언덕으로 나와. 추울지도 모르니깐 두둑하게 입고 나와야 될 걸.” 언덕에는 주호가 먼저 나와 있었다. 어제보다 빛이 바랜 둥근달이 검은 능선위로 향수처럼 떠올라 있었다. 달빛을 밟고 중랑천까지 갔다 오면서 주호는 처음으로 그간 가슴에 묻어두고만 있던 부모의 이야기를 상민이에게 했다. 주호는 유복자라고 했다. 일본군 징집영장을 받자 주호의 아버지는 기왕에 정혼한 어머니와 서둘러 혼례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곤 다음날로 군에 입대했다고 했다.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돌아가셨다고 했다. 주호가 늦은 나이로 중학교에 입학한 날, ‘용감한 황국.......’ 어쩌고 한 전사통지서와 비행복을 입은 사진 한 장을 내 보이며 한숨짓던 주호의 어머니는 아마도 아버지가 가미가제 비행사였을 게라 말씀을 하셨단다. 그런 어머니가 불쌍하고 서러워 어젯밤 달빛에 그만 울었나 보다고 했다. 듣고 있자니 상민이도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가 그리웠다. 그래도 상민이는 주호보다는 자기의 처지가 나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딘가에 두 분 모두 살아 는 계실 테니까. 언젠가는 반드시 두 분을 만나게는 될 터이니까. “그럼 순례는 또 누구야?” 간격을 두었다가 주호가 목을 잦뜨리며 내뱉듯 말했다. “고향 여자애야, 죽었어.” “뭐? 건 또 왜? 어떤 사이였는데?” 등으로 달빛을 받아 그늘진 어두운 얼굴로 주호가 우울하게 설명했다. “나랑 초등학교에 같이 다녔는데 시집가서 애 낳다 죽었어.” 상민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우리가 다른 아이들보다 서너 살 많기로 소니 그럼 몇 살에 시집을 갔단 말인가! 주호가 설명을 덧얹었다. “17살에 시집을 갔거든, 시골에선 일손 땜에 장가도 일찍 보내고 없는 집에선 입을 더느라 시집도 서둘러 보내.” “그래도 애를 낳다가 죽는다는 건 말도 안돼.” 상민은 자기도 모르게 분해 소리치듯 말했다. 주호는 자기가 직접 들은 바라며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 “하필 그 무렵, 마을의 유일한 산파인 잠실네가 갑자기 친정아버지의 대고(大故)를 당해 장례를 치르러 굽은 내 건너 시오리 떨어진 도리 실 마을 친정엘 갔다가 장마 통에 불어난 물로 며칠째 돌아오지를 못했다지 뭐냐, 순례는 어머니가 없이 자랐거든. 산 구완할 사람이라곤 눈먼 시어머니밖엔 없었지, 에이 참 대처에 사는 사람한테라도 시집을 갔더라면 죽지는 않았을 텐데......., 두메 골자구니로 시집은 가 가지구선,” 주호의 말하는 품이 지나치리만큼 울먹여 그냥 짝사랑이나 하던 관계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제에 비해 달빛이 왠지 더 쓸쓸하고 더 외로워 보였다. 주호는 별나게 군복에 집착했다. 학교를 다녀오면 어김없이 남대문 시장에서 사온 군복을 평상복으로 입고 지낼 뿐 아니라 때로는 입은 채로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남들처럼 검게 염색도 하지 않았다. 군인으로 성공하고 싶다며 주호는 육사를 응시했다. 필기시험 전에 치루는 신체검사에 상민은 급우 순태와 함께 주호를 따라갔다. 왕십리에서 자취할 때, 순태는 인근에 살면서 둘에게 김치와 고추장을 떨어지지 않게 가져다줬다. 신검 장에 들어가려던 주호가 멈칫 서더니 강당 옆의 솔밭으로 둘을 데리고 갔다. 5~6년생으로 보이는 어린 소나무들이 사열이라도 하듯 가지런히 심어져 있는 사이에서 주호가 의아해 하는 둘에게 명령처럼 말했다. “너희들 바지 좀 벗어봐!” 둘 다 놀라 자기들 귀를 의심했다. “뭐? 바지를 벗어, 왜?” 주호가 뒤통수를 긁으며 쑥스러운 듯 말했다. “신체검사를 받으려고 보니깐 내 팬티가 너무 낡아서 창피해” 지체하지 않고 둘은 바지를 내렸다. 초겨울 바람이 사타구니사이로 선듯하게 불어 들었다. 상민이의 것이 그래도 그중 성했다. 벗어서 주호에게 줬다. 아무리 친구래도 상민은 주호가 벗어놓은 팬티를 입을 수가 없었다. 다리를 걸쳐 넣기에는 형편없이 삭아 있었다. 학교에서는 마지막으로 진학상담을 했다. 성민의 차례가 됐다. 교무실에 내려가 담임선생님 앞에 앉았다. “석 상민, ㅅ의과대학지원이 맞아?” “네” “왜 의사가 되려고 그래? 전교 1등인 독일어가 아깝지 않아?” “뜻하는 바가 있어서요.” 상민은 속을 숨겼다. 성적을 아는 선생님은 더는 말씀을 안 하셨다. 돌아와 저녁을 먹고 쉬면서 주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의과대학은 과정도 2년이나 길고 등록금도 비싸다던데, 그리고 의학원서가 보통 비싼 게 아니라던데 괜찮겠어?” “어떻게 되겠지 뭐” 대답을 하면서도 상민은 속이 편치 않았다. “공부가 힘들어 아이들 과외 하기도 쉽지가 않다더라. 입주가정교사도 주인 눈치 보여 하기가 힘들대” 주호는 끝내 아픈 곳을 찌른다. 사실을 말했다. “안되면 말지 뭐, 장사를 하던 기술자가 되던 그래도 ㅅ의대를 합격했었노라 하면 남들이 없인 여기지는 못할 거 아냐, 그리고 나도 프라이드 하나는 지니고 살게 될 테니까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수가 있을 거야.” 주호도 더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2월 들어 주호는 육사에 입교했다. 상민은 다음달로 영육원에서도 나가야만 했다. 문리대 교정에서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아침에 태천이가 찾아왔다. 군 복무를 마치고 양복점에 근무하면서도 한달이면 한두 번씩 태천이는 영육원으로 상민을 찾아오고는 했다. “오늘이 발표 날이지? 가자” “싫어, 가면 뭐하냐.” 태천이는 벌써부터 상민이의 속셈을 알고 있었다. “그래두 가는 봐야지.” “그래도 싫다.” 고집을 부렸다. 태천이가 달랬다. “정 그러면 우리 극장구경가자.” 솔깃했다. 이 정황을 잠시만이라도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어디?” “응, 중앙극장에서 네가 좋아하는 데보라 카가 나오는 공포영화를 한대” 구경을 하고 나와 자장면을 먹으면서 태천이가 또다시 상민이를 달랬다. “방을 보지 않으면 합격됐는지 어떻게 알려 구?” “학교 애들한테 물어보지 뭐” “떨어졌다면 얼마나 창피할건데?” 말끝을 내린다. 상민이도 궁금했다. 당당히 붙은 합격 방이 보고 싶어졌다. 자기의 이름이 쓰인 합격명단을 봐야만 했다. 오후3시, 너 댓 사람만이 방 앞에 서성이고 있을 뿐 문리대교정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모두들 오전에 보고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검은 장바구니를 들고 몸뻬 차림으로 교문 쪽을 향해 서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엎어질 듯 상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머니였다. 어머니, 그리도 그립던 어머니였다. “상민이, 우리 상민이가 맞지?” 상민은 목이 메어 말이 안나왔다. 가슴도 손도 온통 떨리기만 했다. 눈물만 펑펑 쏟아냈다. 속으로 자꾸만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이’ 한참만에야 울음을 그친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아침을 치우고 계란을 사러 가게에 갔더니 마침 라디오에서 ㅅ대학 합격자 발표를 하고 있더란다. 그 순간 공교롭게도 ‘2097번 석 상민’하는 소리를 듣자 바로 아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하고 머리를 치더란다. 그길로 한달음에 뛰어오셨다고 했다. “집은 어디예요, 어머니? 진숙이는요? 얼마나 컸어요? 아버지는요?” 조금 진정이 되자 상민은 엉뚱하게도 첫마디로 집의 위치를 물었다. 같은 서울에 살았을 텐데 왜 이제껏 만나지를 못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눈물로 뿌예진 시선으로 어머니를 내려다 봤다. 헤어질 때만해도 키가 성민과 엇비슷했던 어머니는 키도 몸피도 훨씬 작아져 성민의 가슴에 함씬 파묻혀 안겨 좁은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새치도 여러 가닥이 보이고 이마에는 잔주름이 많이도 생겨나 있었다. 얼마를 좀 더 지나서야 들먹이던 어깨를 진정시킨 어머니가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힘들게 말했다. “인천이란다. 아버지가 직장이 그리로 돼서.......,그동안 아버지랑 나랑은 번갈아 한달에 두 번씩 주말마다 논산으로 전주로 광주로 목포로 거제도로, 심지어 제주도까지도 다녀오고는 했었단다.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맸구나, 서울에 있는 걸 모르고.......,인천에 오라오는 길로 서울의 학교에도 갔었지 뭐냐, 폐허가 됐더구나. 막막했지. 그래 얼마나 고생이 많았었냐. 그러고도 그 와중에서 ㅅ 대학을 다 합격하고, 아이 구 내 아들아, 어떻게 이렇게 훌쩍 컸냐! 정말 내 아들이 맞기는 하는 거냐!” 어머니는 복받치듯 또다시 한바탕 오열을 했다. 잠깐일 것 같은 시간이 다시 또 얼마쯤 흐른 뒤 진정이 된 상민이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떻게 첫눈에 저라고 알아보셨어요?” 상민이를 보자마자 댓바람에 뛰어들어 엎어지듯 안긴 어머니가 상민이는 이해되지 않게 궁금했다. “모습이야 어딜 가냐, 너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쏙 빼다 박은 것처럼 닮아서 첫 눈에 알아봤지. 거리를 지날 때마다 우리 상민이도 어딘가 살아있으면 저만하겠구나하고 매양 크기를 가늠했었단다.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머리하나는 더 자란 것 같긴 하다만.......” 어머니는 생시인지 꿈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상민의 어깨를 쓰다듬어 내리고 등을 토닥이며 또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어머니의 등 뒤로 땅에 떨어져 뒹구는 검은 장바구니에선 깨진 달걀의 노란 자위가 비죽이 흘러나와 마른땅을 누르스름 적시고 있었다. 휑하니 빈 교정을 휘돌아든 바람이 소매 깃을 파고들어 선듯하게 찼다. 새가 울었다. 고개를 들었다. 겨우내 마른 마로니에 가지에 봄이 오고 있었다. 2005. 3. 4 湛 如 Webpage arrangement by S. Steven Kim - April 10, 2005 |
2005.04.10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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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시해설] 김소월 : 진달래꽃 [4] | 2005.04.03 | 김 원호 | 2005.04.03 | 9371 |
8 | 진달래 꽃 (素月의 詩와 인생) [3] | 2005.04.02 | Steven Kim | 2005.04.02 | 7609 |
7 | 복 수 초 [7] | 2005.03.29 | 오세윤 | 2005.03.29 | 7355 |
OK with the snow. We had a gorgeous day in Michigan with temperature 70 degrees. I was able to
put in 18 holes, then watch the Masters. That was something. Wasn't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