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4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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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2022.04.14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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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김덕령(1567∼1596)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
적보다 무서운 내부의 모함
올들어 웬 산불이 이리 잦은가. 봄철 산에 불이 나니 피지도 못한 꽃들이 다 불붙는구나. 저 산에 일어난 저 불은 끌 수 있는 물이라도 있지만, 내 마음 속에 연기도 없는 불이 나니 끌 물조차 없구나.
김덕령(金德齡)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서른 살 젊은 나이에 죽은 무인(武人)이 남긴 연시(戀詩)일까. 그러나 이 시조는 매우 절박한 사연을 담고 있다. 그가 형조좌랑(刑曹佐郎)이었을 때 전쟁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등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고, 광해군의 분조(分朝)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전쟁이 화의(和議) 분위기에 들었을 때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난다. 도원수 권율의 명으로 운봉(雲峯)까지 진군했다가 진압됐다는 소식에 진주로 회군했다. 이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로 곽재우 등과 함께 체포됐다. 용력(勇力)이 뛰어났던 그는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했다.
이 시조는 옥중에서 쓴 것으로 전해진다. ‘춘산에 불이 나니’는 임진왜란을, ‘못다 핀 꽃’은 왜병과 싸운 젊은이들을, 적과의 싸움은 무찌를 수 있지만 내부의 모함으로 고초를 겪는 억울함은 해결할 방도조차 없다는 피맺힌 한을 읊은 것이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263
1596년(선조 29) 임진왜란 중에 이몽학이 주동이 되어 충청도에서 일으킨 반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계속되는 흉년으로 민중들의 생활은 비참하였다. 또한, 당시 조정에서는 명(明)·일(日) 사이에 강화를 둘러싸고 찬반 양론의 논쟁이 치열하였다.
일본의 재침을 방비하기 위해 각처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민중의 부담이 가중되자 확대되어가는 민중의 원성과 고통은 현실 여건과 타협될 수 없는 사회 모순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기회를 포착해 이몽학은 불평불만에 가득 찬 민중을 선동, 반란을 획책한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몽학의 난(李夢鶴─亂))]
조선의 역사는 상상을 초월 한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생각 할 수 없는 엉터리 나라 였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음력)에 일어 났다. 이몽학의 난은 4년 후인 1596
년에 발생 한 사건이다.
육이오 사변이 일년만에 소강 상태로 접어 들고 휴전
회담이 시작 되었던 것 처럼 임진왜란도 일년 여 만에
한양이 수복 되고 일본군은 울산과 부산지역에 (왜)성
을 짖고 칩거 했다. 그리고 명나라와 협상을 시작 했다.
조선은 협상에서 제외 되었다. 협상의 요점은 일본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한양을 제외한 경기도를 차지
하고 철군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육군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요지음 예비병 처럼 조직되어 있었던 육군은 그냥
농사군을 모아 놓았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
제2의 명장이라던 이일은 경북 상주에서 패하여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도망하여 충청북도에 진을
치고 있던 신립을 찾아 간다. 제1의 명장 신립도 또한
탄금대에서 전멸 했다.
육지에서의 싸움은 의병이 주도 했다. 수많은 의병장이
전국 각지에서 나왔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자원한 의병
들은 게릴라전을 기가막히게 수행하여 일본군을 괴롭혔다.
전면전에 약한 의병을 보안 하기위해서 조정에서는 관군
과 의병이 협조하도록 도와 주었다. 전쟁이 진행 되면서
관민 합동 군대는 점점 전투력이 향상 되었다. 다시 말하면
관군보다 의병이 더 강해졌고 의병장의 세력이 강화 되었다.
만약 의병장이 반란을 일으키면 관군이 이를 제압할 능력이
없는 형국이었다. 전쟁으로 나라가 쑥대 밭이 되고 백성이
굶어죽고 병들어 죽어 원성이 자자 했다. 선조의 인기는
땅에 떨어 졌다. 선조는 좌불안석이 었다. 의병장을 잡아
넣어야 했다. 이때 이몽학의 난이 일어 났다. 곽재우, 김덕령
등 기라성 같은 의병장들을 이사건에 엮어 넣었다.
이순신은 육지에서 조선관군이 죽을 쑤고 있는 동안 연전
연승 했다. 일본은 육지에서 육군이 한양으로 들어가면 수군이
서해를 돌아 한강을 거쳐 한양에서 만나 보급을 하고 육군은
전라도에 상륙하여 호남을 장악 함으로서 군량 문제를 해결
할 심산이었다. 이순신은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 하여
이러한 일본의 작전계획을 완전히 무산 시켰다. 보급이
차단된 일본군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였다. 전투눙력이 싱실
되었다. 협상에 매달리는 수 밖에 없었다.
선조의 인기는 땅에 떨어 지고 있는 데 이순신의 인기는 하늘
을 찔렀다. 선조는 질투와 두려움으로 이순신을 경외 했고
제거 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우선 이순신의 경쟁자인
원균을 띠웠다. 그러던 차에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이중간첩이 가또(가등청정)가 다시 침공 하니 조선수군이
나아가 미리치면 싱륙하기 전에 전쟁을 방지 할 수 있다고
전해 주었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가또를 바다에서 공격 하라고
명령 했다. 이순신은 일본의 간계라고 이를 거절 했다. 선조는
이순신을 반역 죄로 체포 했다. 1597년 원균은 이순신이 이룩
해 놓은 조선수군을 칠천량 전투에서 거의 모두 수장 시키고
대패 했다. 정유재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