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08 12:03
두 이야기:
First Story: Pension for Korean veterans
Dr. Choi 같은 해군 출신이네요!
저도 여기 기재한것을 모두 프린트해서
여권 첨부해서 담당자에게 보내는 검니까?
역사에 한 부분인일이니까..
우리 동기만 해도 월남파병된친구 권오언, 채무언, 김욱현, 전사한 김수현,
Someone can contact 권오언, 채무언, 김욱현??
나중에 군에 간 동기도 우리 미국온후에 많이 출병햇으리라 추측
한국 역사 전환을 시킨 월남전에 갔다온 사람들 매달 80불 연금은 받아도 마음에 껄리것 없을것 같고 손자 학자금 저축통장에 넣을까 생각
Where we get the appplication form for the record verication , The office address?
Once I fill up the the pension application,
I must send it to somewhere? The office address?
군번 8xxxx
성명 민경탁
생년월 일 1941, xyz day month
해군 1968 년 5월 1일 대위 명예제대
군번 8xxxx
미지막 직무처부서 서울 해병대 사렬부 의무감실.
현주소 1113 Third Ave.
Napa, California, USA
94558
Seond Story: A friend gone.
서울 의대 출신: 최초 월남전 전사자 (1958 입학, 1965 년 졸웝 김수현 동문) 얘기
1965년 2월
6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3 월 초
해군에 입대 鎭海에서 8주 훈련을 마치고
포항 해병사단 군의관으로 발령을 받은지
3 개월만에 한국 정부는 월남에 전투부대 파견을 결정합니다
1965년 9월 포항해병대 기지서 첫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결단식이 이렇게 진행됏고,
저도 이상한 흥분에 싸여
부산에서 배를 타고 5일 만에 Viet-Nam 캄란만에 상육을 합니다
소위 추격사살이 (Search and Destroy) 목표엿던 초기 전투때는, 부상자 사상자가 많이 생겻지요
해병대의 첫번 임무는 캄란 만에 공군 기지 방위가 첫번 과제 엿지만
한국 육군 부대가 몇달 뒤에 파견돼 인계하고
다낭 쪽 북쭉으로 이동하고 자주 전투에 접햇지요.
츄라이, 투이호와 라는 생소한 이름의 지역이옛지요.
전투가 없을때는 근처 동네에 대민진료나 나가, 민간인 치료를 햇고.
어떤때는 할일이 없어
부대안에 가쳐 외출도 못하고 부대가 있는 바다가 에서 낙시질...
또 사병들 포경 수술해주고 선물로 (?) 로 받은 권총 실탄으로 해변가에가서
가끔 사격 연습햇든 기억이 있읍니다.
같은 여단, 포병 대대에 우리 고교 동기
이윤호가 소대장으로 있어 가끔 만낫고
그 친구도 저에게 권총 실탄을
가끔 선물로 가져다 주곤 햇읍니다.
法大 들어가서 해군 법무장교가된 김두희 대위가
(김대위는 제대후 법무부장관까지 하고 은퇴)
한번은 캄란만에있는 우리부대를 방문해 우리 셋이 이렇게 만난 적도 있지요.
벌써 파월된지
6개월이 지낫는데
3 학년 6반 때 옆에 앉어 있엇고
대학교 6년간 같이 몰려 다니든
김수현이 한테서 해군, 해병대로 들어가
"부모가 반대하겟지만 월남에 지원하겟다는" 장문의 편지를 받엇지요.
여러가지 이유로 그편지를 아직도 이렇게 가지고 있읍니다.
아래 졸업식날 찍은 사진 앞줄에
3학년 6반 이엿든 안병환, 뒷줄 김수현이 가 보입니다.
이 친구하고는 가정교사 같이 구하러 다니고, 그림 그린다고 몰려다니고
재시험도 같이 자주 첫고 많은 해를 同苦同樂햇지요
공교롭게 이 졸업사진에 보이는 7 분중 3 명이 故人이 됏읍니다.
뒤 서계신 육군중위는 대학신문에 만화 연재하든 고 김유홍 선배시고,
저는 벌써 임기 일년을 마치고 1966년 9월 다낭을 출발 歸國,
해병대 사령부에서 근무를 하는데
한번은 수현이가 편지와 戰地에서 찍은 다음 사진을 보내왔지요.
얼마 후에는
뜻밖에 그 친구 편지가 아니라
戰死 소식이 전해 졋지요.
뚜렷한 전선이 없는 그곳에서
부대 이동중에 적의 습격을 받아
부대대장, 군의관, 사병들이 전사를 한 일이 버러진 것이지요.
수현이는 연노한 어머님의 외 아들 이엇고.
파병 6개월만에 1967년 한국군 군의관으로
첫번째 전사자가 된것입니다.
추운 어느날 동작동 국군 묘지에서
해군 의무장으로 영결식이 이렇게 있엇읍니다.
* 아래 찍은 사진엔
김수현이 부모와 1966년 입대한 同期 (의대 66년졸업)
3-6 반에 있든 조의렬 중위 (왼쪽 앞에 서잇는 분),
부상당해 한국으로 후송돼 치료중인 병원복 차림의 이종무 주위의 사진입니ㅏ.
비석은 동기생이 모여 건립한 추모비라고 합니다.
(* 조의열 중위의 증언으로 상기사실로 정정함).
저는 수현이가
월남에 자원해서 온다는 편지받고 서는, 반대도 찬성도 안햇고,
제 임무중에 하나가
전사자를 마지막 검진하고 사망진단서 쓰는 작업이엇다는 얘기등 한 기억이 있지요.
육군으로 월남에 판견된 3-8 반 권오언 이도 육군 군의관으로 근무하다 어깨에 총상을
받고 후송 귀국햇지요.
수현이 한테
위험은 항상있다고 썻던 것으로 기억하지요.
한번은 戰死한 병사의 주머니에서
가족에게 미처 써서 부치지 못한 편지도 본기억이 있지요.
아래 같이 戰死한 군인들은
규정상 bag 에 들어간 화물로 후송이 되지요.
매년 이맘 때
미국의 Memorial Day 가 오면
피어 보지도 못한 꽃송이 같이
body bag 속에 싸여 후송되어 가는
수현이의 모습을 그려 보고
장례식날,
눈물을 감추려든
수현이의 年老한 어머니 생각이 잊어 지지 않읍니다.
또
왠지 모르지만
동작동 국립묘지에 서있든
"고 해군 대위 김수현" 碑石 생각과
東京 야스쿠니 신사에서 본
일본 군인 유가족들이 세운 碑의 생각이 교차됩니다.
민경탁
2010.05.08 12:08
2010.05.08 12:26
2010.05.08 13:08
1. 유형:
김수현 대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찡해옴을 느끼지요.
전사 소식듣고는 해군 본부에서
귀국한지 6 개열만인 저한테 가족들과 동작동에서 장례식할때 연락을 하란 심부름을 시깁디다. 해군 병원 식당에서 남은 쌀도 전해드리고.
그래서 수현이 어머님 뵐 기회가 몇번더 있엇지요.
학교때도 더러 찾어 갔엇지만,
창신동인가에서 방아간을 운영하고
kg 55 회ㅡ거쳐 의대 나온 외독자 기대고 살든 어머님이엇는데..
그 당시는 나라가 가난해서
전사자 수당이 몇푼이 나왓는지 기억이 없지만
수현이 어머님 노후를 국가에서 제대로 예우햇는지 궁금하지요.
저는 장례식 끝나고 몇달후 카나다로 인턴하러 가버렷지요.
2.
수현이는 괴짜옛는데
그 친구가 어디 고물상에가서 스케이트 사서 피규어 스케팅을 한다고 겨울 왕심리 미나리 꽝에 나가서 열심히 연습을 하드니 한번은
전국 남자 피규어스케이트 경기서 상을 탓다고 자랑하든 기억이 있지요,
빙싱경기에 김연아 할아버지 되는 격.
3.
또 한가지 심부름한것은
진해에서 매년 해군 군의 학회를 하는데
15 -30 분 주면서
전사 당시 상황을 참석한 모든 군의관들에게 보고하라고 해서
그때 습격당햇을때 살아 남아 부상당해
서울 해군 병원에 후송된 해군 위생병 해병대 사병 장교 찾어가
전사 당시의 전투 정황을 취재후
스라이드 쇼로 보고한 기억도있읍니다.
이런 얘기 시간이 지나면 다 없지게 마련..
4.
연금 관게 신청서등 여러가지 첨부서류 최원일 형이 고맙게 보내주셔서
제가 아는 대 여셧분에게 모두 전파햇읍니다.
최원일형 다시 감사하고..
정말로 연금이 나오면
외손자놈 학비 준비 구좌에 넣을 예정입니다.
제가 피난가서 충남 대덕군에서 국민 학교다닐때
할아버지가 쌀 팔어서 공책 연필 사주시든
기억이 새로 살아 남니다.
2010.05.08 14:00
2010.05.08 14:31
민경탁 선생의 월남 자원에 관해서 저도 몇마디 보태지요.
민선생과 나는 해군 군의 동기생으로 첫해 포항 해병기지에 같이
배속받아 이사람은 포항 해병 상륙사단 1연대 1대대 군의관으로
민선생은 2대대 군의관으로 있었는데 같은 동기로 해군병원에
근무하던 채무원동기와 셋이서 포항시내에서 하숙하면서 볼룸
댄스교습,돼지족발에 소줏잔 기울이며 세월을 축내고 있던중
해병 청룡부대 파견건으로 군의관 차출로 전전긍긍하던때였습니다.
나중에는 월남을 서로 갈려고 했지만 초창기에는 서로 안갈려고 해서
군번순위로 보낼작정이었는데 민선생은 해당도 되지않었었는데
주위의 우리들의 만류에도 고집을 꺾지않고 자원했던것입니다.
영문도 모르던 서울의 가족이 내려와서 손을쓰시겠다는것도 민선생의
고집은 꺾지 못했고 후에 채무원 동기도 월남에 가서 미군부대에
파견중 전사해온 김수현동기를 처음 check하기도 했다는 슬픈 기억도
생각나고 김수현 동기 장례식때는 해군본부 의무감실에 일할때라
지금도 생생이 기억하고 있지요.
지금은 다 지나간 슬픈이야기가 되었군요. 규정
2010.05.08 16:15
2010.05.08 21:17
포항에 배치 되자, 한달 논에
둘러 싸인 장교 숙사애서 살엇는데,,
그 때 밤에 매일 울어 대는 개구리 소리가 그렇게 처량하게 들리드군요.
촌 구석에서
좀이 쑤셔서 여기 글쓴 황규정 동문과 다다미 방하나를 포항시내서 빌려
하숙생활을 하고 밥은 근처 식당에 한달치 값 내고 항상
아무거나 진수 성찬으로 얻어 먹고,..
그 당시 제가 "히틀러" 가 쓴 " 나의 투쟁" 이라는 책을 읽고
들뜬 기분에 살든 때인대,
그만 전쟁터 구경해 보겟다는 호기심등,
여러 요소가 작용애 군대 들어간지 5 개월 만에 전쟁터로 쫓아간 것이지요!
어찌보면 산소통 들고 높은 산에 올라가는것과
대동 소이한 심리 상태가 아닌가 합니다.
그 당시 해병대 사병중에 지원한
사람이 무척 먾엇든걸로 기억..
지금 생각하니 월남에서 지낸 일년이
내 생애 중 재일 긴 방학같이 기억 됩니다.
2010.05.09 00:52
2010.05.09 10:25
2010.05.09 14:29
Previous comment was moved here as a reply, since it is a long story.
Thanks for reading it throug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