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4 08:37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023
김두봉은 최현배와 같이 주시경의 제자 였고 한글
하면 남한에서 최현배 북한에서 김두봉이였다고 합니다.
인공 건국 당시에 양대 세력이었던 연안파(중국 공산당)와
친소세력(김일성파) 권력 투쟁에서 연안파가 저서 그도
숙청된 것 같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무장 독립운동은 대부분이 만주와 시베리아
에서 중국 공산당과 쏘련의 도움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반면에 중국 본토에서의 독립운동은 장개석의 국민당에
예속되어 진행 되었습니다. 장개석이 미국의 원조를 받았고
모택통과 권력 싸움을 하고 있어서 자연히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들은 친미, 친서방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해방 후 남한에서는 공산주의 경력을 가진 사람들을 "악인"
취급을 하면서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협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한 인사들을 무시 했기 때문에
오늘 날 남한 사랍들은 그들의 공과를 공평하게 평가 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지음 그동안 음지에 가려져
있던 인사들이 많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2023.04.24 10:30
2023.04.24 20:10
선배님의 기억이 맞습니다. 이외의 그에 대한정보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2023.04.25 01:27
김두백씨 맞는 듯합니다.
내가 유치원생때 강릉에 갔고, 소학교 2학년 일학기에 상경하였지요.
아버지께서 늘 부르던 이름 같습니다.
일화한가지: 어머니가 날 데리고 무슨 잔치에 갔었는데, 안방에 부인들만 모여서 놀면서 어머니에게 한곡을 부탁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웃으면서 "나는 그런 노래는 못불러요."하시니까 아무거라도 하라고 간청하여서 어머니가 한시 한수를 읊었는데, 여자분들속에서도 마주 하지않고 돌아 앉으신 후에 시를 끝냈지요.
그 강릉유지 여자분들이 그 뜻을 몰랐겠지만, 갑자기 숙연해 지고 조용하여졌던군요.
그 집이 대로변에 있는데 높은 곳에 지어서 아래가 다 내려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나의 어렸을 적 기억인데, 1943년 여름에 우리세식구가 강릉으로 가게 된 연유는 아버지 친구 한분이 그렇게 서울서 고생하지 말고 자기 사는 강릉으로 오라는 권고로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 집은 큰 부자집으로 나의 기억에 남아있었다.
해방후 우리는 다시 상경하였지만, 언젠가 나는 그 분이 북한의 김두봉의 동생이라고 들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의 기억이 너무 희미하여서 내 말이 틀릴수도 있다.
그 분의 이름은 김두X였다.
신빙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