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08 13:16
대원군, 민비 그리고 서재필 #5/5
서재필의 청년 계몽
서재필은 매주 배재학당에서 젊은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인권개념, 사회계약론을 가르쳤습니다.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등이 서재필의 강의를 경청했습니다. 이승만은 서재필에게 크게 감화를 받았고 김규식 등 과 함께 협성회라는 청년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서재필은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토론대회를 여는 등 청년들에게 토론 방식을 가르쳤습니다.
만민 공동회
독립문 건립을 위해서 관료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협회를 시민단체로 전환하고 대중 토론회를 주관했는데 이를 만민 공동회라고 했습니다. 토론회는 전국을 순환하면서 이루어졌는데, 1897 년 11 월 1 일에 열렸던 제 8 회 만민 공동회는 노비 해방운동이 주제였습니다. 많은 청중이 모인 자리에서 참가자 중에 대표가 찬,반 성토를 한 후 윤치호가 노비제도의 폐해와 비인간성을 성토하고, 서재필이 미국 흑인 노예제도의 참상을 살명한 후에 투표에 붙여서 다수 쪽으로 결론을 내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입헌 군주제 주장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통해서 입헌 군주제를 주장했습니다. 왕을 상징적인 존재로 하여 그 권한을 내각이 갖게하고 충추원을 의회로 바꾸자고 고종에게 건의했습니다. 일본과 보수세력 그리고 고종이 반대하여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아관 파천; 친러파의 쿠테타
권력은 친일파 개화당에게 있었습니다. 일본은 개화당, 대원군과 내통하여 일국의 왕비를 시해한 후에 대원군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씨워서 나쁜 국제 여론과 조선 국내 여론을 무마하려 했으나, 상황을 직접 목격한 외국인들의 증언으로 여론은 일본측에게 불리하게 돌아 갔습니다. 이러는 중에 대원군은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습니다. 일본에 대한 여론이 좋지않음은 개화당에게도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개화당이 추진한 단발령은 친일 개화당에게는 치명 타였습니다. 상투를 자르는 것은 부모가 준 신체를 훼손하는 불효 여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할 정도로 백성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친러, 친미 정동파들은 이러한 반일, 반개화의 국민 감정과 고종의 공포에 떠는 상황을 이용하여 고종을 외국 공관에 모시고 자기들의 정권 탈환을 계획 했습니다. 미국공관으로 고종을 모실려고 시도했 으나 실패했습니다(춘생문 사건).
이범진과 심상훈은 러시아 공관과 긴밀하게 연락하여 고종을 러시아 공관에 모시는데 성공했습니다. 1896 년 2 월 11 일에 일어난 사건 이고 아관 파천이라고 합니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을미사적 전원을 살해할 것을 명령합니다. 을미사적이라 함은 민비 시해사건에 관련된 대신들을 지칭하는 것이었고 친러파의 정적 개화파들이었습니다.
총리 대신 김홍집, 탁지부 대신 어윤중, 통상부 대신 정병하는 피살 되고 내무대신 유길준, 법무 대신 장박, 군부 대신 조희연은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어려운 때마다 정파에 크게 관계없이 내각 수반을 맏았던 김홍집은 길거리에서 관군의 칼에 맞아 죽은 후, 군중이 그의 시체를 한동안 끌고다니는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1890 년대 중반의 조선 사회상
매관 매직이 국가의 시책이라고 할 정도로 성했습니다. 갑오개혁 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더 심해졌습니다. 궁핍한 왕실예산을 충당 하기 위해서 왕도 벼슬을 팔아먹었습니다.
돈을 들여 관직을 받으면 부임지 백성들을 착취하여 축재를 했습니다. 양반과 상민으로 갈라놓은 소위 반상제도는 조선 건국이래 국가 구조의 근간이었습니다. 1890 년 대에 양반 인구가 전체 인구 대비 얼마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시대에 양반 인구는 약 2%로 알려져있습니다. 아마 이 때는 더 많았으리라고 추측됩니다. 아무튼 소수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양반들이 소유하고 있던 노비 인구가 30-40% 였다는 것입니다. 노비제도는 19 세기 이후로 점차적으로 이완되어 그 수가 19 세기 말에는 많이 줄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들은 양반들의 재산 목록이었고 사고 팔고 했습니다. 나머지가 보통사람 즉 상인이었습니다. 약 60%에 달하는 일반백성 들은 극소수 양반의 착취 대상이었 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습니다. 1882 년에 연해주 한인 인구가 만여명이었는데 러시아 사람은 겨우 8385 명이었다고 합니다. 1897 년에는 15 년 전의 두배가 넘는 2 만 5 천명이 되었습니다.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과 연해주를 비슷한 시기에 여행하면서 조선인들의 생활상을 관찰했습니다. 그의 저서 “코리아와 그 이웃 나라”에서 조선의 상황을 “특권계급의 착취, 가혹한 세금, 정의 부재, 쇠약해진 군주, 미신, 자원없고 음울한 더러운 나라”라고 서술했습니다. 발전할 수 없는 형편없는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연해주에서 조선인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열심히 사는 것을 보고 완전히 생각이 바뀜니다. “조선 사림들은 자기의 노동의 대가로 얻은 이익을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제도와 과도한 세금을 징수 하지 않는 지도자가 다스린다면 언젠가는 번영하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예견했습니다.
고종의 경운궁 환궁 (1897 년 3 월 4 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조선 최고 의 권력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대신들은 모든 정사를 그와 상의해서 결정했습니다. 웨베르는 많은 이권을 따내는 대신 고종에게 친절하게 잘 대해 주었습니다. 그것도 고작 100 일, 갑자기 그들의 태도가 시덥지 않게 변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을 서로 나누어 먹을려고 협상을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에게 38 선에서 분활하여 남쪽은 일본이 북쪽은 러시아 가 관장할 것을 제의했으나 러시아가 거절했습니다. 운명의 38 선 아디어는 일본이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백성들의 여론과 독립협회의 요구, 러시아의 푸대접, 왕 호위병 훈련 완료 등 여건이 마련되자, 고종은 외국 공관이 주위에 많이 있는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왔습니다. 대한제국 탄생
1897 년 10 월 12 일 고종은 원구단에서 하늘에 고하고 황제에 등극 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대한이란 말은 마한, 진한, 변한 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다음 달, 22 일에 민비 시해 2 년 2 개월 만에 민비를 명성황후로 추존 하고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요지음 돈으로 무려 110 억이 들었다고 합니다.
대원군 사망
1898 년 2 월 22 일, 주상이 보고싶다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대원군이 사망했습니다. 며느리 장례식이 치루어진지 일 년여 만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대원군의 약력은 조선의 운명사이다. 조선은 완전한 유교주의 국가로서 중국의 오랜 역사의 반복과 다름 없다. 지금의 세계대세로 보면 조선은 유교국의 체제를 유지하는데도 모자란다. 대원군은 이러한 유교국가의 명군에 불과하다.”
고종은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고 먼 발치에서 쳐다 보았습니다. 자기 권력을 위해서 아들을 철저히 이용했고 아들의 아내까지 죽인 아버지를 보고 싶었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서재필 다시 미국으로
1898 년 5 월, 서재필은 귀국한지 2 년여 만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 가야만 했습니다.
그의 국수주의적인 생각과 왕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입헌 군주제 주장은 러시아는 물론 모든 외국 세력들과 고종에게 도전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미국 공사 알랜과도 서재필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통해서 외국 공사들의 부당한 조선 이권 취득 행위를 비판하는 것을 이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의 고종 앞에서의 예의없는 행위나 조선인을 무시하는 행동등은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양반 고위 관리들도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독립신문의 논조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미국공사 알랜은 공사이면서 고종의 고문이었습니다. 그는 고종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이권에 개입했던 사업이 많았습니다. 서재필은 알랜의 부당한 행위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서재필에게 귀국 하라고 여러번 종용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미국에 있는 서재필의 장모에게 자신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서재필 부인 뮤리엘에게 보낼 것을 요청했습니다. 어머니의 전보를 받은 뮤리엘의 설득으로 서재필은 조선을 떠났습니다.
미국 귀환 후 서재필
그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돌아오는 병원선 군의관으로 근무했습 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의대 해부학 강사와 병리학 연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의사일을 그만 두고 문방구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러던 중 1919 년 3 월 1 일, 조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무척 기뻐 했습니다. 그렇게 세상 일을 모르던 조선 사랍들이 이제 깨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독립운동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자금을 써서 1924 년에 파산 선고를 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계가 막연했는데, 마침 유한주식회사를 만든 유일한씨가 1925 년에 서재필에게 사징직을 맡겼습니다. 유한양행의 유명한 버드나무 로고는 서재필의 딸 뮤리엘이 도안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미 병리학 전문의
1926 년, 62 세의 고령으로 펜실바니아 의대에 입학하여 병리학을 전공했습니다. 1929 년에 조선인 서재필은 최초로 병리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1941 년에서 1945 년, 약 4 년 동안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봉사하여 미 의회로 부터 공로훈장을 받았습니다. 20 세의 젊은 나이에 쿠테타 군을 지휘하여 고종에 반역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기적같은 일이였습니다.
해방과 죽음
1945 년, 해방 후 미군정은 이승만의 독주를 견제할 만한 인물을 물색하던 중 김규식의 추천으로 서재필을 초청했습니다. 1947 년에, 서재필은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인사들이 정치 참여를 종용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미국인 자격으로 미군정 고문관으로 일 하다가 1948 년 9 월에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조국을 떠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 당하지 말라. 정부에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 만이 평생 소원이다.”
풍운아 서재필은 후두암과 방광암의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1951 년 1 월 5 일 향년 88 세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유골은 화장 되어 필라델피아 안장되어 있다가 1994 년 국립묘지에 모셔져 있습 니다.
결론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있는 역사는 지나치게 일본의 침략 행위를 악으로 강조하고, 조선 정부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한 취약한 국력 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점을 감추어서 자존심 살리기에 치중했다고 생각합니다.
민비는 결코 명성황후 오페라나 연속극에 나오는 지혜로운 국모가 아니었고 권력 유지를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나라 살림 보다는 부정 축재에 더 관심이 많았던, 동 시대의 청 나라 서 태후에 버금가는 나쁜 왕비였습니다. 후자는 청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 이었고 전자는 작은 나라 조선을 일본에게 먹히게 한 많은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민비의 정적 대원군은 아주 간교하고 무자비한 권력의 화신이었습 니다. 그는 대중의 인기를 거의 죽을 때 까지 유지할 정도로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끈 질긴 권력에 대한 집착은 결국 민비 시해에 깊숙히 관련하게 했습니다.
철없는 젊은 개화파들은 일본에게 철저히 이용당했습니다. 그들은 청이 조선 망국의 원인이라고 굳게 믿었고 일본 세력을 빌려서 청이 조선에서 손을 떼게 했으나, 청 대신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데는 전혀 대책이 없었습니다. 일본, 개화파, 대원군은 모두 민비가 걸림돌이었습니다. 뇌화부동할 소지가 농후했습니다.
갑신정변 후 서재필은 권력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가서 의사가 되어 주어진 인생을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조선사람들이 무식해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고 무능한 고종을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조국에 대한 애증은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이 좀 더 계몽된 민족이기를 간절히 바랐고 조선이 독립국가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국이 부를 때 마다 돌아와서 성의껏 도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절대로 그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본 받아야할 만한 인생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교육은 국민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과거의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아 현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직시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풀린 자존심은 현 세대를 교만하고 나태하게 만들 뿐입니다.
끝
|
2018.09.09 04:18
2018.09.09 06:13
제 아들 놈이 브라운-연대 교환 학생으로 연대에서 6개월간 학습 한후 미국에 막 돌아와
저 한테 묻기를, “why did you come here? You are SNU graduate and everybody
there looks up to them.” I said to him, “ I hated Korea. I sat on the plane and looking
down Korea last time. I felt so relieved and happy.”
I really did not want to go back to Korea when I left in 1974. In 10 years, I went back
to see my parents and brothers and sisters. Now I go back every year and stay there
for a month.
”Hate and love” was what 서재필 had about his motherland. When I was reading about his
life, I empathized with him a lot. The reason why he left the country was that what
she was then not compatible with his ideal.
She rejected him when he was saying to her, “I love you.”
I do not feel like I can live in Korea now. I do not like many aspects of Korean culture; Confucius
etiquettes. I think many of them are unfit to the modern ideal; freedom, equality, and humanity.
Privacy and individualism are frequently ignored and it demands conformity.
But she has grown up to present herself for visitors to have a good time. She makes me come back
every year partly because she is very nice, partly because I love her.
WM! I thank you for your interest and giving me an opportunity to participate in the website.
2018.09.09 07:58
Thinking about our native home of Korea is always an emotional thing.
We are the ones who left the native valleys like a Danny Boy.
However, those dear people we loved are no longer there waiting for us to return.
As we will be closing our eyes here, we probably will miss her but I would not want to know why.
Have we really left home? Maybe, physically but not mentally.
One of our pioneers, 서재필 must have felt the same way.
We can hardly imagine how sad and disappointed he was.
One way or the other, we should stay strong and follow his way. God bless Korea!
2018.09.09 17:23
나의 독후감
Dr. 온의 대원군, 민비, 서재필을 읽으니, 한편의 장편역사소설 같습니다.
나는 별로 한국 근세사에 관하여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중고교 시절에 부산 피란학교에서 수업을 하였기에 교육상황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지요.
내용에 하도 많은 인물들이 나와서 모두 기억하기 힘들 정도네요.
그래도 나로서 몇 가지 개인적인 소감을 써 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대대로 가난하고 힘없고 남에게 의존했던 나라가 아닙니까?
이조후반기로 가면서 국정은 부패일로로 걸었고, 망국의 당파싸움에만 용감했던 대신들로
망국의 길로 나라를 몰고 가지 않았나요?
이런 상황에 어떤 지도자가 나와도 부흥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대원군에게는 공과 과가 다 있지요.
나라를 외국에게 빼앗길까 우려해서 쇄국정책을 썼지요. 그 시작은 정당하다고 믿습니다.
그 집권 당시 국내에는 아무도 구미 열강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없었고,
그들과 소통할 만큼 외국어 즉 영어, 불어 등을 구사할 인물이 없었던 시절이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문호를 열어 외국 늑대들을 불러들이면 먼저 들어오는 자가 당장 점령할 건
명약관화한 일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대원군은 우선 쇄국하고 젊은이들을 국비로 해외에 보내서 외국 교육을 받도록 하였는데
불행히 민비에게 정권을 빼앗겨서 그 계획이 실패가 되었다고 깅동인작 “젊은 그들”에서
설명을 잘 하고 있으며,그 내용은 나의 모친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와 흡사합니다.
어머니는 소녀시절에 외조부님으로부터 대원군과 민비 이야기를 들으셨던 내용이지요.
민비가 정권 탈취 목표로 청국, 일본, 노서아등에게 준비 없이 문호를 활짝 열어 놓은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도 남지요.
민비는 왕비였지, 왕이 아니었기에 앞장서서 나라 일을 주관하면 안 된다고 믿습니다.
그가 한 일은 시아버지를 권좌에서 쫓아내고 청, 일, 노서아와 “Collude”하다가
결국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거 아닌가요? 민비가 있어서 국가에 도움이 된 건 없고
결국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김을 촉진시켰다고 보겠습니다.
그 당시 구미 열강은 경쟁적으로 동양 각국을 빼앗아 저희 노예로 만들지 않았나요?
밖 세상을 알지도 못하며 문호개방만 선호하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영국은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인도를 침탈하는 데 쓰였으며,
게다고 종교를 이용하여 인도의 국가비밀을 모두 알아내었으니, 종교를 스파이의 도구로 썼고,
그 못지않게 불란서는 안남을 정복한 후 안남인이 독립항쟁을 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굴속에 가두고
하늘을 보는 세금(Sky tax)을 받았다고 옛날“안남망국사”가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만 겪었던 고난이 아니었고, 일본을 제외한 동양 전체가 당했던 대 비극이었지요.
글을 써보니, 내가 지나치게 대원군을 변호하려고 한 듯하네요.
그 이유는 나의 외조부님은 정의의 남아셨고, 대원군 파였으며, 직함은 그렇게 높지는 않았는데
참판 즉 종이품 현재로는 차관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외조부님으로부터,
나는 어머니로부터 대원군이야기를 들어서 많이 그 분의 영향을 받았지요.
어느 때 대원군이 실각 후 경회루에서 사람을 보내 어떤 자 즉 친일파 한 놈을 죽여달라고 하면서
외조부님의 직위를 두 단계 낮추어서 현재로 검사로 만들어서 그 자를 상의할 일이 있다고 불러서
그 자가 곤대짓하고 들어오니, 외조부님은 “저 죄인을 잡아라”하여 그가 미쳐 대꾸하기전에
그를 묶어 꿇어 앉친 후 죄상르 읽고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하여 죽이고,
사직서를 쓰고 피신을 하셨지요.
외조부님은 불란서 영사인지 대사인지로부터 즉 불란서 정부로부터 불란서시민이 되었기에
일본 경찰이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나는 외조부님이 애국자라기보다 이조말에 충신이라고 자부합니다.
나의 의견에 대하여 다른 의견이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2018.09.10 00:26
두 시간 짜리 강의를 글로 써 노니 너무 길고 메세지 전달이 잘 안될 것으로
짐작 되어 요점을 정리해 봤 습니다.
1. 1860년의 역사 적 중요 성: 중국 중심에서 근현대 구미중심의 세계질서로
바뀌는 전기.
2. 당시의 중심인물: 조선; 민비와 대원군, 일본; 이등박문, 중국; 이홍장
이러한 시대 적 배경에서 출생하여 인생을 시작 했던 미국의사 서재필
의 삶.
3. 조선의 부패와 무능을 감추고 제국주의 강대국의 악랄한 침략 야욕에
망국의 원인을 돌리는 사관에 대한 비판
4. 대원군; 60년 세도정치를 청산, 백성의 삶을 증진 시킨 민족의 영웅 vs
1860년이라는 어마어마 한 변화에 둔감 했던 인물
5. 민비시해의 진실; 일본이 죽였다고 하여 반일 감정을 부추기고 자국의
자존심을 살리려는 노력은 민비를 미화 시키는 또 하나의 허구로
이어 졌음을 지적.
6. 우리와 비슷한 조선인 미국의사 서재필의 인생여정을 우리 동창들의
그것에 비추어 고찰.
7. 사대에 대한 새로운 인식; 망국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얽혀 있지만, 가장
중요 한 것은 중국에 억매인 "사대"에 있었음을 강조.
청나라, 일본, 조선의 일관된 외교 정책은 전통 적으로 "쇄국정책"에 있었
습니다(본문에서 이야기 했슴). 특히 일본은 문을 열 면 그들에게 나라가
망한 다고 생각 했고, 조선은 청이 그러니 우리도 그래야 함은 너무나
단연 한 원칙 이었 습니다. 쇄국 정책은 새로운 생각으로 내세운 정책
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도 사대에서 벗어 날 생각을 하지 못 했 슴을
증명 하고 있을 뿐입니다.
2018.09.10 05:14
지금에 와서 말하기는 쉽지만, 1860년도에 일어난 변화를 어떻게 대응하야야 할 지
그걸 아는 사람이 국내에 있었나요?
아니면 몇 사람의 외국선교사를 채용하는 게 올바른 방법이었는가요?
구미 열강에 대한 지식이라곤 전무한 조선조정에서 어떻게 이를 알고 대응을 해야 할 지
지금 생각해보아도 막연합니다.
할 수 없이 약육강식의 원측래로 조선은 희생물이었을 뿐이지요.
왜 일본같이 빨리 서양문물을 받아드리지 못하였는지 안타깝지요.
명치유신같은 지도자가 없기 때문일 듯합니다.
2018.09.10 05:51
좋은 질문입니다. 일본은 아편전쟁의 시대적인 심각성을 정확하게 파악 했습니다.
반면에 청나라 자신도 교만에 빠져서 그저 서양 놈들이 와서 통상 하자고 해서
항구 몇개 열어 준 것 정도로 인식 했 습니다. 세상의 중심인 중화가 망하게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 았 습니다. 대원군은 베이징에 다녀 온 사람들에게서
아편전쟁에 대한 소식을 들 었고, 자연히 그리 심각한 것으로 받아 들이지 않
았 습니다. 그리고 청나라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 았 습니다.
일본은 네델란드 사람들에게 아편전쟁에 대한 소식을 들었 습니다. 그들은 중국이
보잘 것 없는 종이 호랑이라는 것을 이미 파악 하고 있었 습니다. 그리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라가 서양사람들에게 망하게 된다고 판단 했 습니다.
본문에서 이야기 했듯이 개화파의 시조 박규수는 김옥균에게 지구본을 보이면 서 중화
사상이 허구 임을 가르 쳤 습니다. 사대는 곧 수구 보수를 의미 하며 중국이 세상의 중심
이라는 전 근대의 세계질서를 믿는 것이었 습니다. 1860년에 청나라와 조선은 이를 고수
했고 일본은 구미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부지런히 따라 갔습니다. 전자는 같이 망
했고 후자는 조선을 정복 했습니다.
2018.09.10 11:24
Dr. 온:
공부가 많이 되었읍니다.
정 선배님 말씀 대로 " 장편 역사 소설"을 읽는 듯 한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혹시 이것을 역사물로 쓰신 것이라면, Internet 또는 중요 paper 사료/자료가 있으시면
Could you share with us as references?
2018.09.10 11:44
가장 중요한 참고서는 “강준만의 조선근대사 산책”입니다. 10권 짜리 책입니다만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 습니다. 위키디피아, 유 튜브 등 인터 넽 에 있는 정보
등을 수집 정리 한 후 여러번 반복 해 서 읽으며 많은 사고를 했 습니다.
거의 일년 걸린 제 나름 대로의 작품 입니다.
서재필에 관한 책은 서울 청계천 등을 뒤지며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았으나 실패 했
습니다. 찾은 3권의 책은 위키디피아 정도의 수준 이었 습니다. 누가 그의 일생을
소재로 소설을 쓰면 대작을 창작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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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41 | 부산정치파동과 미국의 이승만 제거계획 | 2024.04.25 | 온기철*71 | 2024.04.25 | 21 |
8840 | 코너킥으로 웃었다... 황선홍호, 일본 제압하고 8강으로 [5] | 2024.04.22 | 황규정*65 | 2024.04.25 | 30 |
8839 | [시조]懷古歌: 회고가 [1] | 2024.04.21 | 정관호*63 | 2024.04.21 | 11 |
8838 | 부산형무소 살해사건 | 2024.04.20 | 온기철*71 | 2024.04.20 | 18 |
8837 | 육군 방첩대. 미군 CIC, 그리고 김창룡 | 2024.04.17 | 온기철*71 | 2024.04.25 | 20 |
8836 | 김구의 일생과 암살의 원인 | 2024.04.14 | 온기철*71 | 2024.04.25 | 18 |
8835 | OPERA MIGNON: Connais tu le pays [1] | 2024.04.12 | 정관호*63 | 2024.04.12 | 25 |
8834 | “쏘니,너와 함께 뛴건 행운!”, 400경기 감동 축하영상 [5] | 2024.04.06 | 황규정*65 | 2024.04.22 | 33 |
8833 | 길에서 만난 한식 [1] | 2024.04.03 | 정관호*63 | 2024.04.09 | 33 |
8832 | 돌아오는 기러기 [1] | 2024.03.27 | 정관호*63 | 2024.04.18 | 46 |
8831 | 이강인-손흥민 ‘골 합작’ 한국, 태국 3-0 완승…월드컵 최종 예선 진출 성큼 [2] | 2024.03.26 | 황규정*65 | 2024.03.27 | 43 |
8830 | 1945년 8월 15일 오후 강릉 홍제정 안마을에서 [2] | 2024.03.19 | 정관호*63 | 2024.03.24 | 76 |
8829 | 이승만은 왜 김구를 제거 했을까? [1] | 2024.03.17 | 온기철*71 | 2024.03.18 | 52 |
8828 | My Grandson [1] | 2024.03.15 | 노영일*68 | 2024.03.18 | 107 |
8827 | 蜀相(촉상): 촉한 승상 제갈량 [1] | 2024.03.15 | 정관호*63 | 2024.04.12 | 59 |
8826 | 1945년 8월15일에는 서울에 아무일도 없었다. [1] | 2024.03.13 | 온기철*71 | 2024.03.14 | 53 |
8825 | 왕소군 고향에서 [1] | 2024.03.08 | 정관호*63 | 2024.03.20 | 57 |
8824 | 정약용; 늙어가면 친구가 점점 없어진다. [5] | 2024.03.06 | 온기철*71 | 2024.03.08 | 90 |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 당하지 말라.
정부에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 만이 평생 소원이다.”
- by 서재필 in 1950s
When I arrived in the US in 1965, someone from SNU Alumni Association sent me a pamphlet
and a book(?) in order to ask me a contributions to form a "Phillip Suh Foundation."
I knew it was about 서재필. But I was not in any shape to make a contribution then.
I did not know well enough about him until I read Dr. Ohn's article here today.
How great he was !! I deeply respect the way he lived his own life.
He tried to work for Korean people but the ignorant uncivilized people betrayed him.
Even today, it seems that the ignorance still remains. It won't disappear anytime soon.
Deeply disappointed, he declined the job in the Korean government
and had chosen to live in America as a plain US citizen.
I agree with him. Probably, in his shoes, I would have done the same thing myself
and actually, it seems that I had done the same, either proudly or shamefully.
With my respect for Phillip Suh, I have no regrets about what I had done.
The history tells me that exactly. It is a great lesson that I happened to follow.
Am I a betrayer to my fatherland? I do not know.
Dr. Ohn, I appreciate your hard work to bring this article here
to enlighten us with a history of the unfortunate past of Korea. Thank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