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7 09:14
판문점 (연속 #7/7)
서울의 밤
서울에서의 첫날밤, 7시부터 북적 대표단을 위한 경회루 파티에 는 각계인사 8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범석 한적 수석대표와 김 태희 북적 단장은 시종 손을 잡고 연회장을 두루 돌며 참석한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기자들과 보도일꾼들은 판문점에서의 만남보다 더 진지하게 남북 적십자회담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 꽃을 피웠다. 특히 남북으로 흩어졌던 동창들이 30여 년 만에 백발의 노안으로 서로 얼굴을 확인하고는 학창 시절로 돌아가 담소하는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했다.
연회장 한쪽에서는 한복 차림의 국립국악원 연주단이 ‘장춘불로 (長春不老)’ 아악을 연주했고, 반대편에서는 서울시립관현악단 이 봉선화 등 우리 노래와 헝가리무곡 등을 연주했다. 북적 대 표들은 분위기에 압도된 듯했다. 연두색 옷차림으로 파티에 참 석한 북적의 홍일점 이청일은 한적 대표 정희경 대표와 짝이 되 어 연회장을 돌아다녔다.
그 연회장에서 나는 최수만을 만났다. 판문점 린치 사건이 있은 뒤 처음이었다. 나는 북한측 명단을 보고 최수만이 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서울에 오면 약속했던 술 한잔을 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최수만 동무! 우리 술 한잔 하자.” 나는 강하게 최수만을 끌어당겼다. 최수만의 자그마한 입에서 비굴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판문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미안 함일까, 어정쩡한 답이 돌아온다. “일 좀 하구, 술 한잔 하자우.” “일은 무슨 일, 간첩일 말이야?”
경회루 파티에 참석한 800명은 한국의 저명한 인사들이었다. 최수만은 이들을 사진에 담아가려는 것이다. 그는 바쁘게 한국 측 인사들을 향해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내 말에 당황한 듯 최수만의 반달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기가 죽어 있었다. 어 이가 없다는 듯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자, 한잔 받아. 오랜만이야!” 나는 양주병을 들어 최수만의 잔에 가득 따랐다. “평양에서 최 동무를 찾았지. 어떻게 된 거야?” “나, 그땐, 조직되지 않았어.” “잔을 받았으면 나도 한잔 줘야지.”
우리는 마주 섰다. 얼마 만인가. 판문점 집단구타 사건의 주인 공이 내 앞에 서있었다. 지난 일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건배를 했다. 얼음에 녹아내리는 양주가 빙글빙글 도는 무지개 색 네온에 반짝였다. 나는 최수만과 포옹을 했다. 최수만을 힘껏 껴안았다. 판문점에서의 감정이 스르르 녹아내 리는 듯했다. 봉선화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은은히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그 장면이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던 모양이다. 주위에서 술을 마시던 사진기자들에게 자극을 주었던지 사방에 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기자들은 진하게 포옹하고 있는 남북의 두 기자를 카메라 렌즈 속에 연신 담았다. 포옹이 영상으로 맺히는 순간이었다.
서울에서 열린 2차 적십자회 담 본회담의 환영 리셉션에서 만난 필자(오른쪽) 와 북한 기자 최수만. 당시 7·4 공동성명과 적십 자회담의 해빙 무드를 타고 남측 언론에서는 ‘남 북 기자 서울에서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크게 기 사화했지만, 북측 당국이나 최 기자는 이 사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는 ‘남북 기자 서울에서 만나다’라는 타이틀로 최수만과 내가 진하게 포옹하고 있는 사진과 기사가 실렸다.
이날 오전 10시 조선호텔 1층 그랜드볼룸에서 제2차 본회담이 열렸다. 한국측 이범석 수석대표는 연설문에서 “이 세상에서 단 한군데 주소를 적고 우표를 붙여도 편지가 배달되지 않는 단절된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이 나라 남북 사이의 장벽”이라고 이산의 아픔을 토로했다. 이어서는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의 축하연설이 있었다.
김 총장의 단장을 끊는 듯한 호소가 회담장 분위기를 숙연하게 했지만, 노동당 중앙위원인 윤기복의 연설은 정 치웅변 그대로였다. 인민복 차림으로 단상에 오른 그의 높은 톤과 태도는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영광스러운 민 족의 수도 평양” “우리 민족의 경애하는 수령이신 김일성 동지” “위대한 주체사상과 자주적인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통일”…. 남북 이산가족 찾기와는 거리가 먼 정치선전 연설은 분노와 실망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서울 2차 본회담에서 합의된 사항은 ‘7·4 공동성명 정신과 동포애 그리고 적십자사의 인도주의 정신을 철저히 구현하자’는 것뿐 성과가 없었다. 이산가족이 만날 날은 요원하기만 했다.
북한 대표들이 서울을 떠나는 날, 시민들의 표정은 차분했다. 이들이 서울로 올 때의 흥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북적 대표들의 뒤를 따라 판문점에 갔다. 판문점에서 최수만을 찾았다. 신문에 보도된 사진을 기념으로 건 네주기 위해서였다.
“최수만! 수고했어!” “….” “서울에 온 소감이 어때?” “….” 최수만의 얼굴 표정이 밝지가 않았다. “이거 사진이야, 우리들의 기념사진….” 나는 경회루에서 찍은 사진을 건넸다. 최수만은 사진을 받더니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 “왜 그래?” 나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최수만은 판문각을 향해 올라가버렸다. 최수만의 태도로 보아 경회루 리셉 션에서 찍은 사진과 기사가 문제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북 기자 서울에서 만나다’라는 제목과 사진이 그들의 조직 내에서 혹은 노동당 조직지도부의 검열과정에서 체크된 것 같았다. 남반부에 가서 혁명을 하라고 했 지 술 한잔 얻어들고 남반부 기자의 품속에 안겨 아양을 떨라고 했는가, 최수만의 행위에 당에서 가차 없이 철퇴 를 가한 것은 아닐까.
최수만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이제 평양으로 가면 벌을 받겠구나, 상급 보도일꾼으로 승진하려고 그렇게 안 간힘을 쓰더니 그만 꿈이 산산이 깨어지는구나, 갖가지 생각이 흘러갔다. 나를 이용해 한 건 하려던 최수만도 어 떻게 보면 가련했다.
북한측 대표들은 그들이 타고 온 차로 판문각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 나는 환송대에서 두 손을 흔들었다.
“잘 가라 최수만! 잘 가라! 언젠가 또 만날 날이 있으리라!” 최수만의 얼굴이 떠올랐다. 작은 입으로 웃는 모습이 소녀같이 순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 먼지가 뽀얗게 일어 차 모습을 감췄다.
1973년 8월28일, 평양측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김영주의 이름으로 남북 적십자회담의 중단이 일방적으로 선언됐다. 회담이 시작된 지 2년6일 만의 일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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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7번으로 나누어 올린 단편소설 "판문점"이 끝납니다.
우리가 잘모르는 알려지지 않었던 판문점 남북협상의 실화들입니다.
작가 이며, 동시에 그당시 판문점에 남한 중앙정보부 파견 기자였던 김일홍씨에게 감사드립니다.
동아출판사 (DongA.com) 작품외에는 어디에도 쓰여지지 않았던 우리 역사의 한토막입니다.
본인은 김일홍씨 만큼은 술은 잘 못하지만 가끔 그와함께 술을 나누는 기회가 있어서 그런지
본인이 마치 북한의 불쌍한 "최수만 기자"처럼 느껴집니다. ㅎ, ㅎ, ㅎ.
염려 마십시요. 본인은 이제 누구에 못지않게 언제나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북한에서 태어난 본인으로서, 거저 먹기로 찾은 자유는 아니지요. 파란만장 끝에 얻은것이지요.
단지 이 실화소설을 읽으면서 "본인이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것이지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혼란스러운 현재 남한의 정국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일주일후면 닥아오는 6.25 기념일에
남한과 북한 사람들 모두함께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