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22 12:43
제43회 동아일보-신동아 논픽션 공모 우수작
작가 - 김일홍 그옛날 문산과 개성을 잇던 의주로의 한적한 주막거리 널문리가 이제는 겨레의 한과 바람이 함께 서린 곳이 되어버렸다. 휴전선 약 250km의 유일한 창구로 민족의 아픔을 해결하려는 장이기도 하고 아직도 휴전협정 위반 사항을 풀기 위해 설전을 벌이는, 긴장이 도사리고 있는 대좌(對座)의 자리이기도 하다. 서울과 평양을 달리던 철마(鐵馬)는 지금 쉬고 있다. 남쪽에서 올라가다 단절된 역이 문산역이고, 북쪽의 경의선을 타고 내려오다 단절된 역이 바로 청교역이다. 그 사이가 겨우 27.3km, 걸어도 반나절이면 이를 거리를 사반세기가 넘도록 국토와 민족과 역사를 이토록 가슴 아프게 단절해놓을 수 있을까.
임진강 철교를 지나 한적한 널문리를 돌아 조금 올라가면 널문리 다리가 나오는데, 사천(沙川) 위에 놓인 볼품없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인상적이다. 취적교(吹笛橋)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다리를 다시 하나 건너면 오른쪽으로 다섯 봉우리가 솟은 오관산이 보인다. 왼쪽으로는 철쭉꽃으로 유명한 진봉산이 있고 그 사이를 지나면 인삼 향이 물씬 풍기는 고도 동개성(東開城)으로 불리는 청교역에 이른다.
예부터 개성상인들이 장삿길 떠날 때 이곳에서 가족과 기약 없는 이별에 울고, 돌아올 때 이곳에서 아낙과 다시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이산과 상봉의 현장이다. 그래서 이곳을 옛 사람들은 눈물들(淚原)이라고 불렀다. 아득한 고려 때부터 약초가 자라고 소쩍새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평화의 마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아온 우리 겨레의 삶터, 이제 널문리 콩밭은 전세계에 노출된 분단의 전시장이 되어버렸다.
1970년 3월. 아직 겨울의 냉기가 미처 가시지 않은 초봄, 늦추위 속에서도 봄은 찾아든다. 잿빛 하늘엔 한기가 서려 때 아닌 눈이 내릴 것만 같다. 나는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빈 사무실로 돌아와 햇볕이 스며드는 창가를 등받이로 두 발을 책상위에 걸치고 오수를 즐기려는데 양지(경비) 전화가 요란스레 울린다. 유엔군사령부 홍보담당관의 ‘전화통지문’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나는 볼펜을 잡고 메모지에 전화통지문을 쓸 자세를 취했다.
수신 : 중앙정보부 부장 참조 : S 국장 제목 : 판문점 군사정전회담
1970년 3월13일 오전 10시48분 경기도 연천지역 비무장지대 안에 침투해 들어온 북한군 무장공비 세 명과 한국군 수색대의 교전 끝에 공비 두 명을 사살하고 기관단총 두 정, 배낭 석 점을 노획, 한 명은 북상 도주한 사건이었다. 나는 전화통지문 내용을 타자 치고 나서 결재 고무인을 찍고 결재판에 넣어 팀장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판문점에서 열리는 군사정전회담은 유엔군과 북한이 맺은 정전협정에 따른 것이다. 한국은 이들의 놀이에서 빠졌다. 정전협상 당시 한국은 ‘통일할 때까지 끝장을 보자’며 협정 체결을 반대했다. 그러나 전쟁의 불리함을 잘 알고 있던 북한은 교묘하게 ‘평화’를 앞세워 휴전협상을 제의했다. 유엔군은 공산주의자들의 끈질긴 전략전술에 말려들었고, 2년 17일간의 협상 끝에 판문점이 탄생했다. 결국 유엔군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전쟁에는 이기고 협상에는 졌다”는 말을 남겨야 했다.
당시 나는 판문점에 출입하는 중앙정보부 보안담당 요원이었다. 판문점에 출입하는 각 신문사와 방송사 기자, 외신기자들의 신변안전과 보안업무, 북한 기자들로부터 첩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띠고 판문점에 출입하고 있었다.
판문점은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적과 적이 만나는 장소다. 적과 적이 만나는 장소는 전쟁터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판문점에는 스릴도 있고, 폭력도 있다. 남과 북 기자들이 서로 거짓 미소를 짓는가 하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공작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어느 날 내가 회담장 창틀에 매달려 험악한 분위기의 회담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는 북한 기자가 취재수첩에 뭔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호기심이 동해 슬그머니 수첩을 훔쳐보았더니, 깨알같은 글씨로 ‘우’자와 ‘적’자로 구분해서 양측의 발언을 적고 있었다. 나는 북한 기자의 팔꿈치를 툭 쳤다.
“‘우’는 뭐고, ‘적’은 뭐야?” “동무는 판문점에 들락거리면서 그것도 몰라?” 북한 기자가 실눈을 뜨며 내게 면박을 준다. “그래 모른다.” 나는 빈정거렸다. “‘우’는 주체의 조국이고, ‘적’은 미제국주의의 앞잡이인 남반부지.” “기자 동무, 그래서 지금 우리는 적인가?”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적이지.”
한국측 기자들은 양측 발언을 ‘남’과 ‘북’으로 적는다. ‘남’과 ‘북’이 사실이라면 ‘우’와 ‘적’은 현실이다. 똑같은 대상을 두고도 남북 기자들의 취재수첩에서부터 이렇듯 판이하게 기록되는데, 남북회담에서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판문점 회담시에는 항시 군용 ‘쌕 버스’가 나온다. 판문점 취재단인 각 신문사, 방송사, 외신 기자들이 출발지인 중앙청 내 문공부 뜰 앞 느티나무 밑으로 삼삼오오 모여 판문점행 쌕 버스를 기다리며 잡담을 하곤 한다. 판문점에는 민간인이나 민간 차량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팀장과 나는 두 대의 버스에 각각 나눠 타고 출입기자들에게 판문점 내에서의 보안사항 및 북한 기자들과 접촉할 때 주의할 점과 취득한 첩보는 보고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출입기자 명단에 기재된 이름과 소속을 확인하고 숫자가 맞으면 쌕 버스는 회담장으로 출발한다. 관광객에게는 신기함과 두려움이 숨어 있는 판문점이지만, 이 코스를 자주 다니는 기자들은 별 관심없이 비스듬히 누워 모자란 잠을 청한다.
덜컹거리는 차의 움직임 소리가 요란하게 반복되면 임진강 철교에 들어선 것이다. 판문점에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임진강 한복판에 앙상하게 남은 교각이 서 있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폭파된 철교의 잔해로 쓰라린 과거를 지닌 교각이다. 산비둘기들이 교각 틈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그 밑으로 흙탕물이 꽤나 거세게 흐른다.
이곳이야말로 휴전 직전 막바지 전투에서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가 이데올로기라는 미명하에 피를 흘린 곳이다. 지금도 전쟁의 흔적이 여기저기 깔려있다. 주인 모를 고분과 남북으로 달리던 철마가 산허리에 쓰러져 있고, 탄흔에 녹슨 어느 병사의 철모가 아무렇게나 누워 있다. 벌건 철모 사이로 피어난 보라색 바이올렛은 병사의 못다 피운 젊은 꿈을 아쉬워하듯 살며시 얼굴을 내밀고 웃음꽃을 피운다.
두 번째 철문을 통과하면 남방한계선인 비무장지대가 나온다. 차창 프레임 속에 대성동의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가 사라진다. 차가 판문점 쪽으로 돌아서면 멀리 북쪽 기정동의 인공기가 철탑에 걸려 펄럭이는 것이 보인다. 판문점에 들어가기 직전 미군 에드번스 캠프에 들러 커피를 한잔하며 유엔군사령부 홍보담당관의 간략한 회담 브리핑을 듣고 판문점으로 들어가는 것이 관례다.
버스가 시간에 맞춰 군사정전회담장 앞뜰에 도착하면, 북한 기자들은 벌써 뜰에 나와 늑대처럼 어슬렁거리고 있다. 낯익은 기자를 보면 서로 반갑다고 악수를 하거나 심지어 포옹하는 이들도 있다. 판문점 뜰에는 오늘 회담의 주요 내용인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증거로 유엔사에서 마련한 전시물이 놓여 있다. 한국군으로 위장한 무장공비의 사살 모습 사진이며 공비들이 소지했던 기관단총, 카메라, 망원렌즈, 배낭, 농구화, 담배, 찐쌀, 미숫가루, 약품 등등. 회의장 테이블 위에는 철책이 아니라 마이크 선을 분단선 삼아 늘어놓았다. 마이크 선을 가운데 두고 양쪽 대표들은 무표정하게 대좌하고 있다.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공의 선을 넘지 않는다. 분노와 흥분이 밀려오면 목청을 높여 욕을 하거나 일어서서 삿대질을 한다. 이런 행동은 거의 북한 몫이다. 그러나 회담장 안에서 아무리 격앙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와도 남북 기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양지바른 곳에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눈다. 서로 지껄이다 보면 상대방의 약점을 건드려 신경을 곤두세우는 경우도 있다. 허점을 이용해 상대방의 약을 올리는 행동은 대개 한국측 기자들의 몫이다.
“여보, 당신 가슴에 달고 있는 게 뭐요?” “보믄 모르간.” “당신들이야 알겠지만 우리야 알 수 있나?” “그 뭐, 알믄서 와 그래.” “글쎄, 그게 단군 할아버지면 몰라도 왜 그렇게 살이 쪘어!” “똑똑히 보라무나, 보면서도 몰라?” “그래 똑똑히 보자, 네 할아버지냐?” “이거 와이래! 도발적 언동 삼가라우.” “말하기 거북해? 이름도 못 대는 주제에 그건 뭘 하러 달고 다녀?” “이거이 눈깔에 뵈는 게 없는 기가?”
앉아 있던 북한 기자가 벌떡 일어나 주먹을 쥐고 공격적인 자세로 돌변한다. 남한 기자는 모른 체하며 한술 더 떠다 그친다. 여기서 물러서면 북한 기자의 주먹 공세에 밀리는 것이 되므로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일 게다.
“그런데 그게 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던데, 너희들 계급 표시냐?” “그거야 뭐 취미대로 다는 거지, 이상할 것 없수다.” “허! 수령님을 취미대로 단다…. 그럼 그 흉상도 취미거리로군!”
(다음계속: 이수근 탈출사건 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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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머지안어 다시 닥어 오는데 이번 6.25는 더구나 혼란한 한국정세에 더 불안해집니다.
저자 김일홍씨의 "판문점"이라는 documentary 단편소설을 7회에 걸쳐서 며칠에 한번씩 올립니다.
판문점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사실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본 사람은 극히 적겠지요.
한국 CIA에서 현지기자로 파견되었던 김일홍씨의 실제 얘기입니다.
김일홍씨는 잘아시겠지요. 2013년 2월에 "철새"라는 단편이 우리 website에 이미 있읍니다.
이것도 이북에 관한 얘기인데 기억이 않나시면 아래를 click해서 다시 보십시요.
http://www.snuma.net/xe/index.php?&document_srl=21739
이책의 소개는 본인보다는 이미 쓰여진 "한인노인신보의 소개문"으로 아래에 대신힙니다.
바록 조그만 책이지만 우리 역사의 숨은 기록이 되겠지요.
남북 적십자 회담장 안팎의 실상 실감 나게 묘사한 생생한 기록
남북 기자 긴박한 취재 경쟁 등 많은 것을 시사하는 작품「판문점」
“40 여년의 긴 세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판문점이 눈에 선하다. 아옹다옹하던 판문점의 옛 친구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들이 그리워진다. 아마도 나차럼 노년의 삶을 살고 있거나 먼저 타계한 기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김일홍 선생이 2007년 12월「신동아」에서 기획한 2천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에 응모하여 우수상을 수상한 작품「판문점」입상 소감의 일부다.
작품「판문점」은 1970년 대 초 판문점에서 열렸던 남북 적십자회담을 취재하러 온 남·북 기자들의 이야기로, 읽고 또 읽고 두번 세번을 읽어도 미진하고 허전함이 남아 또 다시 읽게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아직도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이어서 부모와 형제가 남과 북으로 갈려 살며 상봉은커녕 소식 전달도 되지 않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세월의 흐름을 막을 능력이 없는 이산 가족은 아픈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이제 많은 이들이 세상을 하직하고 있다.
김일홍 선생은 12세이던 1951년 1월 가족과 함께 고향인 평양을 떠나 피란길에서 어머니와 누나를 잃고 아버지와 계속 남쪽으로의 길을 재촉하여 인천에 정착했다. 고려대 철학과에 진학하고 이어서 고려대 대학원을 마쳤으며 대학 강단에서 북한학을 강의한 북한학 교수로 다년간 재직하였으나, 남북 이산을 어린 나이에 몸소 겪은, 그래서 남북 분단의 통한이 누구보다도 가슴 깊이 사무쳐 있는 이산 가족이다.
남북 적십자회담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면서 S 신문사 문화부장이란 직함을 가진 기자로 현장을 지키며 한국 측 기자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본래 문필에 재능이 뛰어난 김일홍 선생은 예리하고 정확한 안목으로 북측 기자를 관찰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북측 보도 요원과도 친밀한 우정을 싹틔우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향이 북한인 김일홍 선생이 남북 적십자회담을 바라보는 눈과 가슴은 남한 출신의 기자와는 다른 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40여년이 지났어도 정확하게 당시의 회담의 실상이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됨을 느끼게 된다.
「판문점」을 읽으면 읽는 이마다 절실하게 떠오르는 아쉬움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해방 전후 사정을 익히 알고 있는 노령에 이른 인사들의 심정은 무슨 말로도 달래 줄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분들의 주위에는 이제 분단의 아픔을 함께 논할 스승도 부모도 없고, 함께 조국 해방에 환호하고 6.25의 처참한 전쟁의 고통을 이겨 온 친구도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진정으로 흉금을 터놓고 세상 일을, 또는 인생사를 논할 벗이 없어져가는 허전함이 노구에 사무치게 아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김일홍 선생은 작품「판문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 일깨움은 지나간 일에 대한 아쉬움이나 후회가 아닌,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 다지고 또 다져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남북통일의 각오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김일홍 선생의 고향은 평안북도 철산이라고 한다. 자수성가한 부친의 덕으로 부유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해방의 기쁨이 가시기 전에 지주계급으로 타도와 추방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6.25 전쟁은 어머니와 누이를 잃는 아픔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20 여년이 흐른 뒤에 남북 적십자회담이 열리는 판문점에서 김일홍 선생은 남한 출신의 북한 기자 최수만 기자를 알게 된다. 최수만 기자는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자유의 나라 한국에서 마음껏 인생의 포부를 펴나가야 할 나이인 고교시절 아버지의 사상의 제물이 되어 북으로 갔으며, 그 곳에서 남 모르는 노력으로 판문점에 파견되는 보도 일꾼이 되었던 것이다.
작품「판문점」에서 김일홍 선생은 최수만 기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이는 나보다 좀 들어 보였는데, 작달막한 키에 양쪽 어깨에 사진기를 두 개씩이나 둘러메고 카메라 가방을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이 우스워 보였다. 그래도 잽싸게 사진을 찍는 모습은 필름도 없이 빈 카메라로 엉거주춤 사진을 찍는 척하는 다른 북한 기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접근했다. 양쪽으로 푹 파진 이마가 귀하게 자란 얼굴이었고 작은 입으로 웃는 모습은 소녀같이 나약해 보였다.”
웬만큼 노령에 접어든 한국인이라면 7.4남북공동성명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7.4 남북공동성명은 이산 가족들에게 가족 상봉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기대를 갖게 했다. 그것은 마치 8.15 광복을 맞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온 그 때의 한국인의 그 심정으로 되돌아가게 했었다.
김일홍 선생이「판문점」을 어떤 심정으로 써내려갔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판문점」을 읽으면 누구나 김일홍 선생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판문점」을 읽음으로써 자신이 한국인임을 다시 깊게 깨닫게 된다.
김일홍 선생은 고향이 평안북도이기 떄문에 북한 출신의 인사이다. 그러므로 북한 출신 남한의 김기자와 남한 출신 북한의 최기자가 통일된 조국에서 함께 일하는 즐거운 날이 와야 한다는 염원이「판문점」을 읽을수록 더욱 간절해진다.
한인노인신보 기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