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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치열하지 않은 고요는 없다 - 배영순

2010.03.17 05:57

김원호#63 Views:8478


치열하지 않은 고요는 없다


배영순 교수의 방하한 생각



적멸(寂滅)이란 개념은 불교에서는 아주 소중한 개념으로 쓰인다.
그래서 ‘적멸을 낙으로 삼는다(寂滅爲樂)’고 말하기도 한다.
적멸은 번뇌가 소멸된 고요한 상태,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삶의 이상적 모습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통상적 이해방식에서
는 적멸은 그냥 조용한 것으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그렇
지 않다. 가령 천지가 조용한 적막강산에 들어 앉아 있어도 내 속이 시끄러우면
결코 고요할 수 없다. 또 바깥세상이 어떻든 내 마음만 고요하면 그만이라고 생각
할지 모르지만 결코 고요해질 수 없다.

내가 해야 할 바를 하지 않고 또 하지 않아야 할 짓을 해 놓고 그렇듯 내 인연들이
오염되어 있는데 내 마음이 고요할 수는 없다. 번뇌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까 고요하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조용한 곳에 들어 앉아 있다고 해서 내 삶이 고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멸이 구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자전거를 탄다고 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가만히 멈추어 서려면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다가 쓰러질 것이다. 가만히 있고자 해서는 결코 고요할 수 없다.
그리고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면 바퀴살이 다 보인다.
이도 고요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아주 빨리 달리면 바퀴살이 보이지 않고 그냥 바퀴만 보인다.
마치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두고서 고요하다는 표현을 쓴다.

그러니까 고요하다는 것, 그냥 조용하다는 개념이 아니다. 치열하게 전진하는
삶, 그속에서 번뇌와 망상이 자리할 여지가 없을 때 고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고요한 것은 치열함에서만 나온다는 그런 이야기다.
‘머무는 바 없이 머물러야 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삶의 품격은 얼마만큼 고민하느냐, 얼마만큼 치열하냐에 따라서 정해진다.
치열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는 삶은 구차하고 비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삶은 치열할 것을 요한다. 치열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그 일관성을 지켜가는 것, 그것을 치열하다고 한다.
그리고 번뇌, 망상이 자리할 여지가 없고 잡스러움이 없을 정도로 치열한 삶,
그것을 고요하다고 한다.

공자는 ‘사십에 불혹(不惑)’이라고 했다. 이도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초지일관할
수 있었다는 것, 그렇게 지행합일에 있어서 치열했기에 달리 어떤 의혹도 없었다
는 이야기다.
공자는 ‘사십에 불혹’이라고 했는데, 우리 세간사 인생은 의혹만 늘어간다.

하늘은 의미 없는 생명을 낳지 않고 땅은 의미 없는 목숨을 기르지 않는다고 한다.
풀 한 포기도 의미 없는 목숨이 없는데, 우리네 인생이 아무 의미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떠돌다가 마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늘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행동해
야 한다.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또한 생각만 하고 행동을 안 해도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다.

‘적멸’이란 개념도 ‘불혹’이란 개념도 밀어두기로 하자.
그러나 이것만은 다시 확인하자.
치열하지 않은 인생, 서툰 인생, 대충 사는 인생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치열하다는 것은 자신이 마주하는 문제를 비켜가지 않고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이
고 그 문제의 한가운데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며 그리하여 끝내 그 문제를 소화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배영순, 영남대 국사과교수



천년의 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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