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희*72
비록 모내기 철은 지났지만
미국 우리 동문들의옛 기억을 되살리기 위하여 글을 올립니다.
우리나라 쌀농사에서 모내기보다 더 큰 일은 없다.
모내기철이 되면 크게 농사를 짓는 집에서는
많은 일꾼을 동원하여야 한다.
이 날의 점심은 특별하게 준비되며,
갖가지 반찬은 함지박에 넣어 머리에 이고,
밥은 양동이에 퍼 담고, 커다란 막걸리 주전자는 애들이 들고 와서,
때맞추어 논두렁에 식사가 펼쳐진다.
경상도에서는 밥은 보리밥이나 이날은 보리를 적게 넣어 짓고,
갖가지 맛있는 반찬도 많이 나오는데 생선반찬 한 두가지는 꼭 들어간다.
오징어 채 무침, 갈치 반으로 나누어 설말린 조림, 고등어자반 등.
별로 비싸지 않은 파래가 많이 들어간 퍼런 김.
시래기와 무말랭이무침 등 여러 가지 묵은 나물,
강된장과 호박잎 쌈, 젓갈과 장아찌, 그리고 국 한 가지.
한마디로 푸짐하고 짭짤하고 맛있는 밥이다.
여기에 시원한 막걸리한잔도 빠질 수 없지요.
어릴 적 내가 살던 대구 침산의 아버지친구 집에서는
해마다 모내기철에 모내기 밥을 보내온다.
그러니 50년 전 이야기지요.
그 후.
74년 무의촌 파견 시에,
왜 그 때는 전문의 응시하려면 6개월간 무의촌에 파견 근무가 필수였지요.
전남 광산군 본양면 1인 근무 보건진료소에서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큰 왕동저수지가 있고, 시골답지 않게 규모 있는 기와집이 있는 데,
이 집의 손자가 그 해에 새로 생긴 본양중학교 학생이다.
나는 교의로,
처는 미술과 가정선생님으로 1주에 7시간씩 무보수로 봉사한 턱에
오토바이 뒤에 타고 가서 모내기 밥을 대접 받은 적이 있었다.
이 건 35년 전 이야기입니다.
며칠 전 후배부부들과 저녁식사를 하며 모내기 밥타령을 하였더니
요즈음은 정나미 떨어지게 3천원짜리 부페로 해결한 답니다.
이런 글을 medical portal site에 올렸더니
“새까만 후배가 글을 올립니다.
그 큰 기와집은 지금도 있구요.
사모님이 가르쳤었던 본량중학교는 학생이 없어 폐교되었고,
왕동 저수지는 지금은 도시민의 휴식처로 바뀌었어요.
전 본량면(현재는 광주로 편입) 바로 옆에 문 열고 있읍니다.
교수님이 예전에 우리 동네에 계셨네요.“
라고 개업하는 후배의사가 답 글을 부쳤다.
모내기 밥과 똑같은것으로,
"벼 수확" 밥 (본인이 억지로 부친 이름으로 "벼 수확하는 날"을 의미 할려함)도있지요.
아마 벼수확 밥이 모내기 밥보다 더 풍성하고 즐겁지 않을가 합니다.
이른 봄에는 집집마다 식량이 떨어져갈때로 생활이 어려울때지만,
벼 수확때면, 다시 식량이 싸이기 시작하니까요 (결국 다음 추수때까지 살아야되는데).
모내기는 먼 희망에 차서 하는것이겠고, 벼 수확은 여름 내내 일한 결과를
끝마치며, 수확후에 타작이 지나면, 식량을 쌓어놓고, 잠시 편하게 살리라는 바람이 있겠지요.
여름 내내 노력해서 드디어 수확을 한다는 기쁨이 보통이 아닌것 같었읍니다.
그날은 집안의 아낙네들도 눈코 뜰사이없이 바쁜날이고,
집안의 아이들도 총동원 되어서 수확을 돕는 날이지요.
논에서 그날 아이들이 잡은 우렁 (?, 소라 같은것)을 넣어서 끌인 국과 함께 나오는
추숫밥은 배고픈 일꾼들에게 점심시간을 기다리게 하고도 남음이 있겠지요.
요새는 콤바인을 쓸테니 이런 마을 사람들의 공동작업이 아직도 있을가 합니다.
본인은 그때 그 "아이"들 중의 하나였었지요, 그후 서울에 온후 까맣게 잊었지만....
석희님, 옛날일을 이렇게 다시 기억시켜주어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