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on drooped low and crows cawed in the frosty sky,
Staring at riverside maple trees and lights on fishing boats is my melancholy sleeplessness.
From the Cold Mountain Temple in the Suzhou environs
Came the midnight toll all the way to visitors' boats telling time.
楓橋夜泊 image
小學唐詩 - 楓橋夜泊 image
楓橋夜泊吟 youtube
楓橋夜泊 : Fantastic presentation in the temple
楓橋夜泊: 三人共同吟詠
楓橋夜泊 唐代張繼
풍교야박은 당대시인 장계의 작품이다. 당조 “안사지난”이후 장계가 한산사를 경과할 때 여행시를 썼다. 이시는 정확하고 절묘하게 서술하여 객선이 야박함에 강남의 깊은 가을밤 경치를 관찰하고 감수하였으니, 그리기를 달 떨어지고, 까마귀울고, 하늘의 서리, 차가운 밤, 강 단풍과 어부의 불, 그리고 외로운 배와 손님등의 모습이니, 경치와 정과 소리와 색이 여기에 다 있다 .이외에 시는 여객의 생각, 나라의 근심, 몸은 었으니 난세에 처하여 돌아갈 곳이 없음을 고려한 표현이 나왔고, 근심을 그린 대표작이다.
전구에는 형상이 선명하여 느낀대로 그리니, 구와 구사이에 논리관계가 또한 비상히 명석하고 합리적이며, 내용이 밝아 쉽게 해석한다. 중국역대의 각종 당시에 채택 되었을뿐 아니라 어떤 아주국가의 소학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일본인듯하다.
《楓橋夜泊》是唐代詩人張繼的作品。唐朝安史之亂後,張繼途經寒山寺時寫下這首羈旅詩。此詩精確而細膩地描述了一個客船夜泊者對江南深秋夜景的觀察和感受,勾畫了月落烏啼、霜天寒夜、江楓漁火、孤舟客子等景象,有景有情有聲有色。此外,這首詩也將作者羈旅之思,家國之憂,以及身處亂世尚無歸宿的顧慮充分地表現出來,是寫愁的代表作。全詩句句形象鮮明,可感可畫,句與句之間邏輯關系又非常清晰合理,內容曉暢易解。不僅中國歷代各種唐詩選本選入此詩,連亞洲一些國家的小學教科書也收錄此詩。
詞句注釋(사구주석)
1. 楓橋(풍교):현재 강소성 소주시 호구구 풍교가도 참문밖이다.
在今江蘇省蘇州市虎丘區楓橋街道閶門外。有人說“楓江古為封江”、“楓橋舊作封橋”(宋周遵道《豹隱紀談》),也有人說,“舊把此橋誤作封橋,到王珪才改正為楓橋”(《吳郡圖經續記》),還有人說,“本為封江、封橋,王珪改封為楓,人們震懾權勢,只得趨附”。夜泊:夜間把船停靠在岸邊。
2. 烏啼(오제):까마귀 혹은 갈 까마귀가 울고, 서리는 하늘에 가득 찼다.
一說為烏鴉啼鳴,一說為烏啼鎮。霜滿天:霜,不可能滿天,這個“霜”字應當體會作嚴寒;霜滿天,是空) 3.江楓(강풍): 오송강 (吳淞江) 가의 단풍나무
一般解釋作“江邊楓樹”,江指吳淞江,源自太湖,流經上海,匯入長江,俗稱蘇州河。另外有人認為指“江村橋”和“楓橋”。“楓橋”在吳縣南門(閶闔門)外西郊,本名“封橋”,因張繼此詩而改為“楓橋”。柯繼承等指出,“唐以前早先楓橋稱作封橋,吳語封、楓同音,以封橋誤為楓橋,因河邊有經霜紅葉樹之故。根據張詩所表明的物候及月相分析推算,張詩當作於農歷十月深秋時分,江南水邊多植烏桕之類樹木,經霜葉紅,古人詩中多混作為‘楓’。故江楓,是泛指江邊的紅葉類樹,不必是楓。”漁火(어화):通常解釋,“魚火”就是漁船上的燈火;也有說法指“漁火”實際上就是一同打漁的夥伴。《全唐詩》“漁火”作“漁父”。對愁眠:伴愁眠之意,此句把江楓和漁火二詞擬人化。就是後世有不解詩的人,懷疑江楓漁火怎麽能對愁眠,於是附會出一種講法,說愁眠是寒山寺對面的山名。
4. 姑蘇(고소):소주의 다른 이름이며, 성 서남쪽에 고소산이 있다.
蘇州的別稱,因城西南有姑蘇山而得名。 寒山寺:在楓橋附近,始建於南朝梁代。相傳因唐代僧人寒山、拾得曾住此而得名。在今蘇州市西楓橋鎮。本名“妙利普明塔院”,又名楓橋寺;另一種說法,“寒山”乃泛指肅寒之山,非寺名。寺曾經數次重建,現在的寺宇,為太平天國以後新建。寺鐘在第二次世界大戰時,被日本人運走,下落不明。
5. 夜半鐘聲(야반종성):한밤중에 종을 두드리다.
當今的佛寺(春節)半夜敲鐘,但當時有半夜敲鐘的習慣,也叫“無常鐘”或“分夜鐘”。宋代文學家歐陽修曾提出疑問表示:“詩人為了貪求好句,以至於道理說不通,這是作文章的毛病,如張繼詩句‘夜半鐘聲到客船’,句子雖好,但那有三更半夜打鐘的道理?”可是經過許多人的實地查訪,才知蘇州和鄰近地區的佛寺,有打半夜鐘的風俗。
白話譯文(백화역문)
月亮已落下烏鴉啼叫寒氣 滿天,밝은달 떨어지고 까마귀 울어 찬기운 기운이 하늘에 가득하네.
對著江邊楓樹和漁火憂愁而眠。강변 단풍나무와 어선등불을 대하여 근심스러이 자네.
姑蘇城外那寂寞清靜寒山古寺,고소성 밖 적막하고 청정한 한산에 옛절이 있어
半夜裡敲鐘的聲音傳到了客船。반야에 치는 종소리가 객선까지 이르도다.
nn 創作背景(창작배경)
장계는 천보12년에 과거급제하여 진사에 이르렀고, 2년후 “안사지난”이 폭발하고, 다음해에 현종은 촉으로 달아났다. 당시 강남이 비교적 안정되어서 적지않은 문사들이 강소와 절강으로 피란갔으니, 장계 역시 그중에 포함되었다. 어느 가을 밤에 소주성 밖 풍교에 정박한 배에 시인이 숙박했다. 강남은 강과 호수의 고장이기에 가을 밤 경색이 유달리 아름다워서 이 근심에 젖은 객을 끌어드려서 그로 하여급 끝없는 시의 아름다움을 이끌도록 하여서, 의경은 맑고도 아득히 먼 짧은 시를 썼다.
根據《唐才子傳》卷三記載,張繼於“天寶十二年(753)禮部侍郎楊浚下及第”,也就是說考取了進士。而就在天寶十四年(755)一月爆發了安史之亂,天寶十五年(756)六月,玄宗倉皇奔蜀。因為當時江南政局比較安定,所以不少文士紛紛逃到今江蘇、浙江一帶避亂,其中也包括張繼。一個秋天的夜晚,詩人泊舟蘇州城外的楓橋。江南水鄉秋夜幽美的景色,吸引著這位懷著旅愁的客子,使他領略到一種情味雋永的詩意美,寫下了這首意境清遠的小詩。
作者 張繼 : 작자 장계 장계는 당대시인으로 자는 의손이며, 양양인이다. 천보 12년에 진사급제하여, 군사막료를 맞았고, 후에는 염직판관을 맡아서 막료직무에 속하였다.
당 대력연간에 검교사부낭중을 맡았다. 당재자전에 "널리 일고 유식하여, 토론을 좋아하고 다스리기에 능하다"라고 평하였다. 기걸을 중히 여기는 인물이며,이상적인물의 포부를 가졌고, 품격이 있어 존경을 받았으며, 글을 새기지 않고, 흥취가 그윽하고 깊으며, 후세에 영향을 끼쳤고, 50수가 전해지며, "장사부시집"이 있다.
張繼(約715—約779),唐代詩人,字懿孫,襄陽(今屬湖北)人。天寶十二載(753)進士,曾擔任過軍事幕僚,後來又做過鹽鐵判官,也屬於幕僚職務。唐代宗大歷年間擔任檢校祠部郎中(另外有史料記載為“員外郎”)。《唐才子傳》中說他“博覽有識,好談論,知治體”,提到他是一位重視氣節,有抱負有理想的人,不僅有詩名,品格也受人敬重。他的詩爽朗激越,不事雕琢,比興幽深,事理雙切,對後世頗有影響。流傳下來的不到五十首。有《張祠部詩集》。
Kwan Ho Chung – Sept 20, 2023
阿房宮賦
阿房宮賦 杜牧
아방궁부 두목
六王畢,四海一。蜀山兀,阿房出。
육왕필, 사해일. 촉산올, 아방출.
覆壓三百餘里,隔離天日。
부압삼백여리, 격리천일.
驪山北構而西折,直走咸陽。
여산북구이서절, 직주함양.
二川溶溶,流入宮牆。五步一樓,十步一閣。
이전용용, 유입궁장. 오보일루, 십보일각.
廊腰縵迴,簷牙高啄。各抱地勢,鈎心鬬角。
낭요만회, 첨아고탁. 각포지세, 구심투각.
盤盤焉,囷囷焉,
반반언, 균균언.
蜂房水渦,矗不知其幾千萬落。
봉방수와, 촉부지기기천만락.
長橋臥波,未雲何龍?複道行空,不霽何虹?
장교와파, 미운하룡? 복도행공, 부제하횽?
高低冥迷,不知西東。歌臺暖響,春光融融。
고저명미, 부지서동. 가대난향, 춘광융융.
舞殿冷袖,風雨淒淒。
무전냉수, 풍우처처.
一日之內,一宮之間,而氣候不齊。
일일지내, 일궁지간, 이기경부제.
妃嬪媵嬙,王子皇孫,辭樓下殿,輦來於秦。
비빈등장, 왕자황손, 사루하전, 연래어진.
朝歌夜絃,爲秦宮人。明星熒熒,開粧鏡也。
조가야현, 위진궁인. 명성형형, 개장경야.
緑雲擾擾,梳曉鬟也。渭流漲膩,棄脂水也。
녹운요요, 소효환야. 위류창니, 기지수야.
煙斜霧橫,焚椒蘭也。雷霆乍驚,宮車過也。
연사무횡, 분초난야. 뇌정사경, 궁거과야.
轆轆遠聽,杳不知其所之也。
녹록원청, 묘부지기소지야.
一肌一容,盡態極妍。縵立遠視,而望幸焉,
일기일용, 진태극연. 만립원시, 이망행언.
有不得見者,三十六年。
유부득견자, 삽십육년.
燕趙之收藏,韓魏之經營,齊楚之精英,
연조지수장, 한위지경영, 제초지정영,
幾世幾年,剽掠其人,倚疊如山。
기세기년, 표략기인, 의첩여산.
一旦不能有,輸來其間。
일단불능유, 수래기간.
鼎鐺玉石,金塊珠礫,棄擲邐迤。
정당옥석, 금괴주력, 기척아아,
秦人視之,亦不甚惜。
진인시지, 역불심석.
嗟乎!一人之心,千萬人之心也。
차호! 일인지심, 천만인지심야.
秦愛紛奢,人亦念其家。
진애분사, 인역업기가.
奈何取之盡錙銖,用之如泥沙!
내하취지진치수, 용지여나시!
使負棟之柱,多於南畝之農夫。
사부동지주, 다어남묘지농부.
架梁之椽,多於機上之工女。
가랃지연, 다어기상지공녀.
釘頭磷磷,多於在庾之粟粒。
정두인린, 다어재유지속립.
瓦縫參差,多於周身之帛縷;
와봉참치, 다어주신지백루;
直欄橫檻,多於九土之城郭。
직난횡함, 다어구토지성곽.
管絃嘔啞,多於市人之言語。
관현구아, 다어시인지언어.
使天下之人,不敢言而敢怒。
사천하지인, 불감언이감노.
獨夫之心,日益驕固。
독부지심, 일익교고.
戍卒叫,函谷舉。楚人一炬,可憐焦土。
수졸규, 함곡거. 초인일거, 가련초토.
嗚呼!滅六國者,六國也,非秦也。
오호! 멸육국자, 육국야, 비진야.
族秦者,秦也,非天下也。
족진자, 진야, 비천하야.
嗟夫!使六國各愛其人,則足以拒秦。
차부! 사육국각애기인, 즉족이거진.
使秦復愛六國之人,
사진부애육국지인,
則遞三世可至萬世而爲君,
즉체삼세가지만세이위군,
誰得而族滅也。
수득이족멸야.
秦人不暇自哀,而後人哀之。
진인불가자애, 이후인애지.
後人哀之,而不鑑之,
후인애지, 이불감지,
亦使後人而復哀後人也。
역사후인이부애후인야.
아방궁부
당조 두목
육국이 멸하니 사해가 통일하고,
촉산이 민둥민둥하니, 아방궁이 세워졌도다.
아방궁은 심벡여리 땅을 덮었고,
궁전은 하늘을 막고 해를 가렸고,
여산북에서 짓기시작하여 서편으로꺾여
직접 함양에 이르렀네.
두 시내는 유유히 궁전담으로 흘러,
오보에 누가 하나고 십보에 각이 하나로다.
긴 복도는 가다가 휘고 높은 처마는 뾰죽하였으니;
각각 지세를 안고 핵심을 향하여 싸우는 세력이라.
원형을 이루어 이어졌고,
또 구부러지고 휘어졌으니,
밀집된 벌의 집, 물의 소용돌이 같이 ,
우뚝솟아 몇천만 자리인지 모르겠도다.
긴 다리에 누운 물결은 구름없이 웬 용인고?
복도는 공중에서 날이 개지도 않는데 웬 무지개인고?
After the end of the Six Kings the empire bounded by the four seas was unified under a single ruler; and with Shu Shan stripped of its woods, the Ah Fang Palace appeared.
It stretched to more than three hundred li, covering the sun in the sky; and from the north of Li-Shan it meandered to the west, and then made straightway for Hsien Yang.
Two rivers flowing gently coursed their way into the palace-walls.
At each five steps there stood a storeyed building, and at each ten steps, there stood a hall, with corridors winding like waving silk, and the projecting eaves turning high up like birds' bills.
Each of the structures possessed its vantage of ground; but they were all ingeniously interlocked together, or one set against another.
Some were domed, and others were curved.
The courts were like so many cells in the beehive; and of the lofty eave-drippings who can tell how many millions they were.
The long bridge is lying upon the waves; how can the dragon come without clouds?
The roofed causeway is stretched in the air; how can the rainbow appear without having a clearing-up sky?
Both the high and the low are shrouded in the mists, and it is hard to distinguish the east from the west.
When the singing platform was re-echoed with happy songs, it was full of genial warmth of the spring; but when the dancing sleeves became cold in the dancing hall, it was chilling like wind and rain.
The climate did remain the same even on the same day and in the same palace!
Noble ladies, royal princes and their children, after bidding farewell to their own chambers and halls, were all carried away to the state of Ch'in; where they practiced singing and music in the morning and evening, and became palace-men and place-women of Ch'in.
Bright stars sparking — it was mirrors laid open.
Green clouds floating about — it was hair-dressing in the morning. The Wei River swelling with grease — it was made by the waste of ointment.
Smoke curling up and vapour spreading — it was burning of perfume.
Thunder rolling suddenly — it was the passing of palace-carriages, which one heard rumbling far off, but none could tell where it went to.
Each inch of the skin was beautified to the extreme, and each movement of the body was studied to the utmost. The pretty ladies, stood gazing and looked forward to a royal visit, and some of them had not had a single dance from the king for thirty-six years.
What Yen-Chao had laid up, what Han-Wei had accumulated, and What Ch'i-Ch'u had treasured up — for many generations and years pillaged from the people — were piled up like mountains; but once they could not hold their own all were transported here.
Tripods and precious stones were treated like kitchen pots and rocks.
Gold and pearls were regarded as clod and pebbles.
They were all scattered about in confusion, being little valued by the man of Ch'in.
Alas! Men are all like-minded, one or ten thousand.
Ch'in loved splendour and luxury, and other men also coveted his house.
Why should he exhaust every dram in taking in, and spend away like mud and sand — making the beam-bearing posts m ore than the peasants in the south fields ,the rafters on the roofs more than the female-weavers on the loom, the shining nail-caps more than the grain in the grand granaries, the uneven rows of tiles more than the silk threads all over the body, the balustrades, lengthwise and crosswise, more than the city-walls of the Nine States, sound of piped and stringed music more than the noise on the market — that the world dared to hate but not to speak, and the mind of the autocrat became daily prouder, and harder!
Behold, at the shout of the garrison guards the Hanku pass fell; and by the touch of the one torch of the man of Ch'u all became a sad stretch of scorched earth.
Alas, it was the Six States and not Ch'in that destroyed the Six States; and it was Ch'in and not the world that exterminated the clan of Ch'in.
If each of the Six States had loved their own people they would have been strong enough to resist the power of Ch'in; and if Ch'in had loved the people of the Six States, he might have ruled the empire through succession from three to ten thousand generations; and who could have exterminated his clan?
The man of Ch'in, having no opportunity of lamenting himself, was left to be lamented by later generations; and the later generations who lament Ch'in, but refuse to learn a lesson from him make later generations lament the later generations.
IMAGES
阿房宮
阿房宮圖: 明代畵家 仇英
Youtube: 驕奢亡國
譯文
六國滅亡,四海統一;蜀地的山變得光禿禿了,阿房宮建造出來了。它從渭南到鹹陽覆蓋了三百多里地,宮殿高聳,遮天蔽日。它從驪山北邊建起,折而向西,一直通到鹹陽。渭水、樊川浩浩蕩蕩的,流進了宮牆。五步一座樓,十步一個閣,走廊長而曲折,突起的屋檐像鳥嘴向上撅起。各自依著地形,四方向核心輻輳,又互相爭雄鬥勢。樓閣盤結交錯,曲折回旋,如密集的蜂房,如旋轉的水渦,高高地聳立著,不知道它有幾千萬座。육국이 멸망하니, 사해는 통일되고; 촉나라 산이 변하여 민둥산이 되니, 아방궁이 건축되었다. 이는 위수 남쪽에서 함양까지 300여리를 덮어서, 궁전은 높이 솟아서 하늘을 막고 해를 가릴 정도였다. ㅜ
이는 여산북변에서 건축을 일으켜 서향으로 꺾어 일직선으로 함양에 들어왔다. 위수와 그 울타리 냇갈은 호호탕탕하게 궁담으로 흘러들어왔다. 다섯발자국에 누가 하나요, 열발자국에 각이 하나이며, 복도는 길게 가다가 굽으러져 꺾이며, 튀어나온 처마는 새의 부리처럼 위로 찌르는 듯 일어났다.
각자 지형을 따라 중심으로 모여들고, 서로 우위를 다투는 세력이로다. 누각은 서로 뒤엉키어 휘어서 마치 밀집한 벌집같고, 회전하는 소용돌이같고, 높이 솟아서 몇천만 자리인지 알 수없도다.
長橋橫臥水波上,天空沒有起雲,何處飛來了蒼龍?復道飛跨天空中,不是雨後剛晴,怎麼出現了彩虹?房屋忽高忽低,幽深迷離,使人不能分辨東西。歌台上由於歌聲響亮而充滿暖意,有如春光融和;舞殿上由於舞袖飄拂而充滿寒意,有如風雨凄涼。一天之中,一宮之內,天氣卻不相同。긴 다리는 물결위에 가로 누웠고, 하늘에는 구름이 일지 않으니, 어디에 푸른 용이 날아 올건가? 거듭 날아서 하늘을 가로지르니, 비온 후 맑지도 않은대 어찌 무지개가 출현하는고? 아랫방은 높기도 하고, 또 낮기도 하여, 그윽하고도 깊어서 흐릿하며, 사람으로하여금 동서를 분별치 못하게 하네.
가대(Singing Stage)위에 울리는 노랫소리는 따뜻함이 충만하여, 봄볕과 융화한 듯; 무도의 전당(Dance Hall)위에서 춤추는 소매가 바람을 받아 나부끼어, 차가움이 충만하니, 비바람이 황량한 듯. 하늘 하나 가운데서도, 궁 하나 안에서도 하늘의 기상은 서로같지 않도다.
六國的妃嬪侍妾、王子皇孫,離開自己的宮殿,坐著輦車來到秦國。他們早晚唱歌奏樂,成為秦國的宮人。육국의 비빈시첩과 왕자황손은 자기의 궁전을 떠나, 연거에 앉아 진국으로 달려 온다. 그들은 조만간에 진나라노래를 부르며, 진국의 궁인이 되었도다.
明亮的星星晶瑩閃爍,那是宮妃們打開了梳妝的鏡子;烏青的雲朵紛紛擾擾,這是宮妃們在梳理晨妝的發髻;渭水漲起一層脂膏,那是她們潑掉的脂粉水;煙靄斜斜上升,雲霧橫繞空際,那是宮女們燃起了椒蘭在熏香;雷霆突然震響,這是宮車駛過去了;轆轆的車聲越聽越遠,無影無蹤,不知道它去到什麼地方。환한 별들은 온 하늘에서 반짝이고, 궁비들은 화장거울을 열었고; 흑청색 구름이 어지러이 날리는데, 아침화장을 하려고 머리를 빗었고; 그 기름덩어리가 위수물에 떠 내려 오는데, 이는 그 궁비들이 던져버린 화장물이로다;
안개 아지랑이는 비스듬히 상승하고, 구름과 안개는 공중을 가로지르며, 이는 궁녀가 훈향을 내포한 초란을 불태운 냄새로다; 뇌정이 돌연 진동하니, 이는 대궐수레가 통과하는 소리요, 들리는 수렛소리는 달려서 멀어지니, 그림자도 자취도 없어, 어느지방으로 내려 갔는지 모르겠도다.
她們每一片肌膚,每一種容顏,都美麗嬌媚得無以復加。宮妃們久久地站著,遠遠地探視,盼望著皇帝來臨。有的宮女竟整整三十六年沒能見到皇帝。그녀들의 피부 한쪽, 미모 하나 이 모두 지극히 아름답기에, 더 이상 붙일 게 없도다. 궁비들은 오래오래 서서 기다리며, 멀리 바라보고, 황제가 오기를 기다리네. 어떤 궁녀는 36년간 황제를 기다렸어도 아직도 못보았으니!
燕趙、韓魏國家收藏的金玉珍寶,齊國楚國挑選的珍寶,是諸侯世世代代,從他們的子民那裡掠奪來的,堆疊得像山一樣。연나라와 조나라, 한국과 위국은 수장한 금옥진보와, 제나라와 초나라는 백성을 강요하여 빼앗은 진보들은, 그 제후가 대대로 백성으로부터 강탈한 보물로서, 또한 산같이 쌓여있었다.
一旦國破家亡,這些再也不能占有了,都運送到阿房宮裡來。視鼎如鐺,視玉如石,視黃金為土塊,視珍珠為沙礫,丟棄得到處都是,秦人看見這些,也並不覺得可惜。일단 국가가 파망하니, 그들을 다시 점유할 수 없었고, 오로지 모두 아방궁속으로 들어왔다. 세발 솟을 쇠사슬처럼, 황금을 흙덩어리처럼 보았고, 진주를 자갈처럼 보았으며, 도처에 버렸으니,
진나라 백성이 그걸 보고도, 아까워할 줄 몰랐다.
唉,一個人的意願,也就是千萬人的意願啊。秦皇喜歡繁華奢侈,人民也顧念他們自己的家。為什麼掠取珍寶時連一錙一銖都搜刮干淨,耗費起珍寶來竟像對待泥沙一樣。한탄하노니! 한개인의 의향은 바로 천만인의 의향이로다. 진황이 번화와 사치를 좋아하면, 백성은 자기의 가정을 되돌아보고 생각한다. 진보를 약탈할 때 어찌 한푼 눈금하나까지 약탈하였고, 진보를 써버리기에는 마치 진흙이나 모래처럼 대하였도다.
致使承擔棟梁的柱子,比田地裡的農夫還多;架在梁上的椽子,比織機上的女工還多;梁柱上的釘頭光彩耀目,比糧倉裡的粟粒還多;瓦楞長短不一,比全身的絲縷還多;或直或橫的欄杆,比九州的城郭還多;管弦的聲音嘈雜,比市民的言語還多。동량을 받치는 기둥이 밭속 농부보다 더 많고, 들보위의 서까래가 베틀에서 일하는 여공보다 더 많고; 기둥위에 반짝이는 못 머리가 창고에 쌓인 조알보다 더 많고; 장단이 다른 기와모서리가 (여인의) 전신을 감는 실가닥보다 더 많고; 곧은 혹은 가로지른 난간이 9주의 성곽보다 더많고; 관현의 소리 조잡함이 시민의 말소리보다 더 많도다. [이것도 나라냐! ]
使天下的人民,嘴上不敢說,心裡卻敢憤怒。可是失盡人心的秦始皇的思想,一天天更加驕傲頑固。結果戍邊的陳勝、吳廣一聲呼喊,函谷關被攻下,楚兵一把大火,可惜阿房宮化為一片焦土。천하의 인민이 감히 입으로는 말을 못했지만, 마음속에 분노가 있었도다. 백성의 마음을 모두 잃은 진시황의 교만하고 완고한 생각은 매일 더 하여졌다. 결과로 변방 수자리 진승과 오광이 호통을 한번 치니, 함곡관이 떨어지고, 초병이 한번 큰 불을 일으키니, 가석하다, 아방궁은 한조각의 불탄 흙이 되었도다.
唉!滅亡六國的是六國自己,不是秦國啊。消滅秦王朝的是秦王朝自己,不是天下的人啊。可嘆呀!假使六國各自愛護它的人民,就完全可以依靠人民來抵抗秦國。들으라! 육국을 멸한자는 육국 자신이었지, 진나라가 아니었도다. 진왕조를 소멸한 자는 진왕조 자기였지, 천하의 사람이 아니었도다. 가히 탄식하리로다! 만약 육국이 자기의 백성을 사랑하였으면, 진나라를 저항하기에 백성을 완전히 의뢰할 수있었다.
假使秦王朝又愛護六國的人民,那麼皇位就可以傳到三世還可以傳到萬世做皇帝,誰能夠族滅它呢?秦人來不及哀悼自己,而後人替他們哀傷;如果後人哀悼他卻不把他作為鑒戒吸取教訓,也只會使更後的人又來哀悼這後人啊。만약 진왕조가 육국의 백성을 사랑하였다면, 어찌 황제위를 3세까지만 전했으리오! 만세까지 황제를 전하였으리! 그 누가 진씨 족을 멸하였을까? 진인이 자기를 애도하지 못하고 후인이 그들을 애상하리; 만일 후인이 그를 애도한다면 교훈을 주는 경고로 그를 사용치 않는다면. 오로지 후인이 그 자손을 애도하리라.
注釋(주석)
六王畢(육왕필):六國滅亡了。齊、楚、燕、韓、趙、魏六國的國王,即指六國。畢 ,完結,指為秦國所滅。육국의 멸망을 말함.
一(일):統一。통일
蜀山兀,阿房出(촉산올, 아방출):四川的山光禿了,阿房宮出現了。兀,山高而上平。這裡形容山上樹木已被砍伐淨盡。出,出現,意思是建成。蜀,四川。촉산 수목을 모두 베어 민둥산이 되니 산아 아방궁이 생겼다.
覆壓三百余里(복압삼백여리):(從渭南到鹹陽)覆蓋了三百多裡地。這是形容宮殿樓閣接連不斷,占地極廣。覆壓,覆蓋(覆壓:應當是指“層層疊疊”)。점령지가 300여리를 덮었으니, 극히 넓다.
隔離天日(격리천일):遮蔽了天日。這是形容宮殿樓閣的高大。하늘과 해 가리다.
驪山北構而西折,直走鹹陽(여산북구이서절, 직주함양):(阿房宮)從驪山北邊建起,折而向西,一直通到鹹陽(古鹹陽在驪山西北)。走,趨向。 二川溶溶:二川,指渭水和樊川。溶溶,河水緩流的樣子。여산북변에서 서측으로 꺾어 함양으로 달리다.
廊腰縵回:走廊長而曲折(낭요만회, 주랑장이곡적)。廊腰,連接高大建築物的走廊,好像人的腰部,所以這樣說。縵,縈繞。回,曲折。 檐牙高啄:(突起的)屋檐(像鳥嘴)向上撅起。檐牙,屋檐突起,猶如牙齒。복도 연결이 얽히어 두르고 돌다.
各抱地勢(각포지세):各隨地形。這是寫樓閣各隨地勢的高下向背而建築的狀態。각각 지형을 따라서;
鉤心鬥角(구심투각):指宮室結構的參差錯落,精巧工致。鉤心,指各種建築物都向中心區攢聚。鬥角,指屋角互相對峙。如今指各自用盡心機互相排擠。궁실을 서로 배합함에 고르지 않게 최선으로 정교를 다하였다.
盤盤焉,囷囷(qūn qūn)焉,蜂房水渦(반반언, 균균언, 봉방수와):盤旋,屈曲,像蜂房,像水渦。焉,相當於“凜然”“欣然”的“然”,意為...的樣子。樓閣依山而築,所以說像蜂房,像水渦。盤盤,盤旋的樣子。囷囷,屈曲的樣子,曲折回旋的樣子。회전하고 굴곡이 벌의 방과 물 소용돌이 같았다.
矗不知其幾千萬落(촉부지기기천만락):矗立著不知它們有幾千萬座。矗,形容建築物高高聳立的樣子。下文“杳不知其所之也”的“杳”,用法與此相同。落,相當於“座”或者“所”。우뚝 솟아 몇 천만자리인지 모르겠도다.
長橋臥波,未雲何龍(장교와파, 미운하룡):長橋臥在水上,沒有雲怎麼(出現了)龍?《易經》有“雲從龍”的話,所以人們認為有龍就應該有雲。這是用故作疑問的話,形容長橋似龍。긴다리아래 누운 물결은 구름이 없는데 웬 용인고?
復道(복도):在樓閣之間架木築成的通道。因上下都有通道,叫做復道。霽:雨後天晴 누각사이에 연결하는 나무로 만든 통로
冥迷(명미):分辨不清。분별하지 못하게 흐림
歌台暖響,春光融融(가대난향, 춘광융융):意思是說,人們在台上唱歌,歌樂聲響起來,好像充滿著暖意。如同春光那樣融和。融融,和樂。 舞殿冷袖,風雨凄凄:意思是說,人們在殿中舞蹈,舞袖飄拂,好像帶來寒氣,如同風雨交加那樣凄冷。대위에서 부르는 노래소리가 울리니 따뜻한 마음이 충만하다.
妃嬪媵嬙(feīpin ying qiang: 비빈잉장):統指六國王侯的宮妃。她們各有等級(妃的等級比嬪、嬙高)。媵是陪嫁的侍女,也可成為嬪、嬙。下文的“王子皇孫”指六國王侯的女兒,孫女。她們 육국왕후의 궁비와 궁녀를 칭하며 등급에 따라 배열하였다.
辭樓下殿,輦(niǎn)來於秦(전루하전, 연래어진):辭別(六國的)樓閣宮殿,乘輦車來到秦國。누각궁전에서 내려와, 연거 타고 진국으로 가다.
明星熒熒,開妝鏡也(명성형형, 개장경야):(光如)明星閃亮,是(宮人)打開梳妝的鏡子。熒熒,明亮的樣子。下文緊連的四句,句式相同。밝은 별이 반짝이며, 화장대 거울을 열다.
漲膩(창니):漲起了(一層)脂膏(含有胭脂、香粉的洗臉的“脂水”)。넘치는 기름끼.
椒蘭(초란):兩種香料植物,焚燒以熏衣物。양종의 향료 식물을 태워 옷에 향기가 배다.
轆轆遠聽(녹록원청):車聲越聽越遠。轆轆,車行的聲音。수레소리 멀리 들리다.
杳(묘):遙遠得蹤跡全無。아득하다.
.一肌一容,盡態極妍:任何一部分肌膚,任何一種姿容,都嬌媚極了。態,指姿態的美好。妍,美麗。어느 피부거나 어느 얼굴이거나, 오로지 지극히 교태가 매력적이로다.
縵立(만립):久立。縵,通“慢” 오랫동안 서서 기다렸다.
幸(행):封建時代皇帝到某處,叫“幸”。妃嬪受皇帝寵愛,叫“得幸”。비빈이 황제의 총애를 받을 때 행이라고 부른다.
三十六年(삼십육년):秦始皇在位共三十六年。按秦始皇二十六年(前221年)統一中國,到三十七年(前209年)死,做了十二年皇帝,這裡說三十六年,指其在位年數,形容阿房宮很大,有多年都沒有見到皇帝的宮女。 收藏:指收藏的金玉珍寶等物。下文的“經營”也指金玉珍寶等物。“精英”,形容詞作名詞,精品,也有金玉珍寶等物的意思。진시황 재위 36년중 26년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剽(piāo)掠其人(표략기인):從人民那裡搶來。剽 ,搶劫,掠奪。人,民。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다. 唐避唐太宗李世民諱,改民為人。下文“人亦念其家”“六國各愛其人”“秦復愛六國之人”的“人”,與此相同。
倚疊(의첩):積累。疊 쌓아 놓다.
鼎鐺(chēng)玉石,金塊珠礫(정당옥석, 금괴주력):把寶鼎看作鐵鍋,把美玉看作石頭,把黃金看作土塊,把珍珠看作石子。鐺,平底的淺鍋。보물솟을 쇠솟으로, 옥을 돌로 보다.
邐迤(lǐ yǐ: 이이):連續不斷。這裡有“連接著”、“到處都是”的意思。연속하여 끊이지 않는다.
意願(의원): 心意、心的方向, 意向. [Wish;Desire;Aspiration] 愿望;心愿. 마음의 방향, 소원. 의향.
一人之心,千萬人之心也(일인지심, 천만인지심야):心,心意,意願. 한사람의 마음이 천만인의 마을이로다.
奈何(내하):怎麼,為什麼。No way. 어찌하리!
錙銖(zīzhū: 치주):古代重量名,一錙等於六銖,一銖約等於後來的一兩的二十四分之一。錙、銖連用,極言其細微。고대중량명으로 극히 미세함.
負棟之柱(부동지주):承擔棟梁的柱子。마룻대를 버티는 기둥
磷磷(인린):물속 돌 모습. 水中石頭突立的樣子。這裡形容突出的釘頭。
庾(yǔ: 유):노천된 곡창 .露天的谷倉。
九土(구토):九州。구주 즉 아홉주. 古代中國的代稱 고대 중국을 대신 칭함
獨夫(독부):失去人心而極端孤立的統治者。這裡指秦始皇。홑지아비로 진시황을 비하하는 표현.
固(고):頑固。완고하다.
戍卒叫(수졸규):指陳勝、吳廣起義。수자리살던 졸병 진승과 오광이 부르짖다. 戍卒(수졸)이란 1.변경(邊境)을 지키던 군졸(軍卒). 2.수자리(戍--) 살던 군사(軍士)
函谷舉(함곡거):劉邦於公元前206年率軍先入鹹陽,推翻秦朝統治,並派兵 守函谷關。舉,被攻占。함곡관을 공격하여 점령하다.
楚人一炬(초인일거):指項羽(楚將項燕的後代)也於公元前206年入鹹陽,並焚燒秦的宮殿,大火三月不滅。항우가 진궁전을 불태워 3달을 탔다.
使(사):假使。가사 or If. 만일
遞(체):傳遞,這裡指王位順著次序傳下去。왕위를 순차적으로 전하다.
萬世(만세):《史記·秦始皇本紀》載:秦始皇統一六國後,“下詔曰:“朕為始皇帝,後世以計數,二世,三世至於萬世,傳之無窮。”然而秦朝僅傳二世便亡。진시황이 만세까지 무궁히 전하라고 조서를 내렸으나, 겨우 2세에 전하고 망했다.
族(족):使……滅族。멸족하다; Genocide. 즉가족(家族)이나 겨레가 망(亡)하여 없어짐.
不暇(불가):來不及。와도 미치지 못하다. Too late
哀(애):哀嘆。슬픔을 탄식하다.
賞析
《阿房宮賦》被選入《古文觀止》卷七,編選者指出這篇作品“為隋廣(隋煬帝)、叔寶(陳後主)等人炯戒,尤有關治體”,很有見地;但由於對杜牧的社會環境和政治態度缺乏了解,還未能准確地揭示作者的創作意圖和這篇作品的思想意義。此賦運用典型化的藝術手法,在不長的篇幅中,將宮殿建築之恢弘壯觀,後宮之充盈嬌美,寶藏之珍貴豐奢,表現得層次分明而具體形像,由此得出秦始皇之所以統治不能久遠,即在於暴民取材、不施仁愛的結論,為當時最高統治者提供了深刻的教訓和警示。全文除了具有震撼人心的思想力量外,也具有很高的藝術價值。
《아방궁부: 阿房宮賦》는 《고문관지: 古文觀止. 卷七》권7에 들어왔고, 수양제(隋煬帝)와 진후주(陳後主)와 기타 사람에게 밝게 경계시키고, 더욱 특별히 다스리는 체제에 통찰력을 주었다. 하지만, 두목의 사회환경과 정치태도를 이해하기에 얼마간 결핍되었기에, 여기서 작자의 창조적의도와 사상적 의의를 완전히 알리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이 부(賦)는 전형적 예술수법을 운용하였고, 짧은 시간에 궁전건축의 장관, 후궁의 가득한 교태의 아름다움, 진귀한 보물의 사치, 분명하고 구체적인 표현, 진시황(秦始皇)의 통치가 오래갈 수없는 까닭은 군중으로부터 재물을 빼앗고, 인애(仁愛)를 베풀지 아니하였음의 결론이니, 당시 최고통치자에게 심각한 교훈과 경고를 보여준다.
전문(全文)은 사람에게 충격시키는 사상역량외(思想力量外)에 대단히 높은 예술적 가치를 구비하였다. .
作者 杜牧 두목[杜牧, 정원 19년
(803년)~대중 6년(852년)은 중국 당나라 후기의 시인이다. 경조부(京兆府) 만년현(萬年縣)의 저자로 유명한 대학자 두우(杜佑)의 손자이며 중당 시대의 시인 두보와 작풍이 비슷하며, 노두(老杜) 두보와 구별하기 위해 소두(小杜)라고도 부르며, 동시대의 시인 이상은과 함께 「만당(晩唐)
의 이두(李杜)」로 통칭된다.
작자가 아방궁부를 썼고, 그 목적은 바로 당시 최고통치자에게 역사적 교훈을 제공하며, 풍부한 역사교훈적내용을 제시하여, 육왕팔, 사해일(六王畢,四海一)…이하 작접 쓰기를 진이 육국을 멸망한게 아니다. 이 규범에 의하여 진이 주인이고 육국은 손님이었고, 육국으로써 진이 과거로부터 교훈을 받았어야 할것이었다.
아방궁속에 무수한 미인, 육국의 비빈, 아방궁속에 무수한 보물, 또 육국이 그 백성을 약탈하여 장기간 축적하였다. 육국이 하루아침에 멸망하니, 미인은 연(輦)을 타고 진(秦)으로 갔고, 보물은 수레로 날르고; 이리하여 진은 육국의 복철(覆轍) 즉 수레가 뒤집힌 길을 밟았으니, 이리하여 무엇이 생길건가? 진은 육국을 교훈으로 삼지않고, 어찌하여 당시 통치자는 진을 오래된 길(老路)로 달렸는가? 여기에 좀 더 좋은 종말이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일단 의론하자면, 거울을 빌림이다. 한서 75권[漢書卷七十五]에서 경방(京房)이 한원제(漢元帝)에게 가로되: 제환공과 진2세[齊桓公、秦二世] 또한 주유왕과 주려왕(周幽王、周厲王)을 듣고 웃지 않았으니, 그런즉 수조와 조고(豎刁、趙高)에 맡기어, 정치는 매일 어지러워 도적이 산에 가득하니, 어찌하여 깊고 냉철한 예측으로 깨어나지 못했는가? 무릇 전세의 왕(前世之君)이 모두 이러하였다. 두럽건데 미래는 현재를 보고, 후(後)로 하여금 금(今)을 웃게 함이 불가능함은 오늘날 양제(煬帝)를 웃는 것과 같다.
이를 알기 어렵지 않으니, 두목왈 “후인(後人)이 깨닫지 못하고 슬퍼함의 의론은 경방과 마주(京房、馬周)의 의론과 같은 맥락이다.” 후인(後人)은 오로지 전인(前人)을 웃고, 전인(前人)을 슬퍼하면서 거울을 꺼내려고 하지 않으며, 전인의 복철(覆轍)을 밟기만 하여서, 이리하여 후인(後人)으로 하여금 후인(後人)을 애도하고, 또한 후인(後人)을 웃으니, 이야말로 진실로 슬프다.
名家點評(명가점평): 대가의 평가
名家點評
宋·陳長方《步裏客談》:《阿房宮賦》只是篇末説秦及六國處佳。若釘頭粟粒等語,俳優不如。 아방궁부는 오로지 끝에서야 진과 육국의 처지를 잘 설명하였다. 만약 “못 머리”나 “조의 낱알”같은 말을 썼으면, 배우는 그만
못했을 것이다.
宋·謝枋得《文章規範》:宏壯巨麗,馳騁上下,累數百言,至“楚人一炬,可憐焦土”,其論盛衰之理,判於此矣。末一段尤含鑑戒,讀之有餘味焉。 광대하고 장엄하다! 위아래로 말달려, 수백언을 다하였다. “초인이 횃불던지니 가련타! 초토가 되었네” 여기에 성쇠의 이치가 있어, 판단하였다. 마지막 단에서 경계를 하였으니, 독후에 남은 인상을 주었다.
元·祝堯《古賦辨體》:《阿房宮賦》,賦也。前半篇造句猶是賦,後半篇議論俊發,醒人心目,自是一段好文字。賦文本體,恐不如此。以至宋朝諸人之賦,大抵皆用此格。……杜牧之《阿房宮賦》,古今膾炙;但太半是論體,不復可專目為賦矣。毋亦惡俳律之過而特尚理以矯之乎? 아방궁부는 부(賦)로써 전반은 시와같고 후반에 토론이 훌륭하며, 사람의 눈을 끄는 좋은 글이다. 이는 산문과 다르다. 송조에서 많은 문인이 부를 썼는데 이런 형식이었다. 이 아방궁사는 고금에 회자(膾炙)되었는데, 너무 논의가 많았고, 이 이상 시에 독점적으로 집중하지 아니하였다. . 배율이 과함을 싫어하지 말고 교정할 필요도없다.
두, 양 이문(杜、楊二文)은 동일 결구(結句)다. 경(敬)의 부속에 몇 마디[敬之賦內數語]는 두우와 이덕유(杜佑、李德裕)가 항상 읊었고, 목은 우의 손자이며, 아방궁사는 실제로 양의 작품을 모방[實模仿楊作]하였다. “강행집록(江行雜錄)”에서 가로되, 목의 아방궁부: 육왕필, 사해일, 촉산올, 아방출. “육참장성부”: 천성절, 장성열. 진민갈, 진군멸. 배행은 목의 앞이니, 즉 아방의 조 장성구법[《阿房》又祖《長城》句法矣]이다.
清·金聖嘆《天下才子必讀書》卷十二:方奇極麗,至矣盡矣,都是一篇最清出文字。文章至此心枯血竭矣。逐字細細讀之。 지극히 아름다우니, 끝까지 다 하였고, 이 한편이 가장 깨끗한 문자였다. 문장을 남김없이 썼으니, 한자 한자 조심스러이 읽으라.
清·吳楚材、吳調侯《古文觀止》卷七:前幅極寫阿房之瑰麗,不是羨慕其奢華,正以見驕橫斂怨之至,而民不堪命也,便伏有不愛六國之人意在。所以一炬之後回視向來瑰麗,亦復何有!以下因盡情痛悼之,為隋廣、叔寶等人炯戒,尤有關治體。不若《上林》《子虛》,徒逢君之過也。 첫번 글은 아방의 아름답고 장엄을 서술하였으나, 그 사치와 화려를 부러워한게 아니며, 바로 그 교만, 횡폭 그리고 원망으로써 백성은 비참하고 육국을 사랑하지 않았다. 횃불 한번 이후 그 사치에서 무엇이 남았는가? 수광, 숙보같은 인물이 경계하고 다스림을 잘했어야될텐데…
清·林雲銘《古文析義》卷十三:此等題目,止要形容得壯麗無比,虧他起手單刀直入,慢把阿房宮點出,不用閒話,遂趁筆寫得如此高大。若徒然高大,何足為奇,乃其中之結構處,則有樓閣,其多已如彼,空闊處,則有長橋複道其雄又如此。抑何如壯留也。然宮言中無可為樂,亦覺減價,乃稽歌舞之人,皆合六國之殊色,接應不暇,即有可為樂矣。使奇珍不列於前,本非全美,乃稽其充牣之寶,皆兼六國之後積,視猶糞壤。則阿房曠古無比也,豈不信哉!但其並作,非出鬼輸神運,皆竭民之財力而為之。民心既失,豈能獨樂,則天下之族秦,竟為秦滅六國之續,可謂千古永鑑矣。蜀山費盡斬伐,末後止還他一片焦土。盛極而衰,理本如此。篇中十三易韻,末以感慨發垂戒意,千古僅作。 이러한 제목은 비할 수없는 장려를 형용함게 그쳤지만, 다행히 단도직입으로 아방궁 지적에 한가로운 말없이 높기와 크기를 지적하였다.
높기와 크기만을 썼다면 어디에 기이함이 있는가? 그 구조에 누각이 이렇게 많았고, 열린 공간에는 긴 다리와 복도가 이와같이 웅장하였다.
그러나 궁중에 즐거움이 없었으니 그 가치가 감소되었기에 완전한 아름다움이 아니었고, 그러나 보물로 가득차서 육국이후에 쌓았기에 쓰레기 처럼 보았다.
아방궁은 옛부터 비할 수없이 넓고 컸으니, 어찌 믿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귀신이나 신령이 만든게 아니고, 백성의 재력을 다하여 만들었다.
민심을 이미 잃었으니, 어찌 홀로 즐기었나? 이리하여 천하가 진을 멸족을 하였으니, 진의 운명은 육국 멸망의 연속이었고, 천고의 긴 가르침이었다.
촉산 나무를 깎아서 없앴고, 후에 돌이켜 한조각 불탄 흙만 남았다. 성함이 극에 달하면 쇠하니, 이치는 이와같다. 편중에 13역운이 있고, 끝에 훈계를 남겼다.
清·王士禎《池北偶談》卷十二:杜牧之《阿房宮賦》,文之奇不必言,然於事實殊戾。按《史》:始皇三十五年,營造朝宮渭南上林苑中,先作前殿阿房。阿房宮未成。二世元年,還至鹹陽,曰:“先帝為鹹陽朝廷小,故營阿房為堂室。今釋阿房宮弗就,是彰先帝舉事過也。”復作阿房宮。二年冬,右丞相去疾、左丞相斯、將軍馮劫諫止作阿房宮作者。二世怒,下去疾等吏。去疾、劫自殺,斯就五刑。是終秦之世,阿房宮未成也。又考《史》:二十六年秦每破諸侯,寫放其宮室,作之鹹陽北阪上,南臨渭,自雍門以東,殿屋複道,周閣相屬。所得美人鐘鼓以充入之。則牧之所賦“妃嬪媵嬙,王子皇孫,辭樓下殿,輦來於秦。朝歌夜弦,為秦宮人”者,指此。此實不名阿房宮,而謂“有不見者三十六年”,非阿房事實矣。“予既辨此,後讀程大昌《雍錄》、趙與時《賓退錄》皆已辨之,大略相同。문장의 기이함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사실은 극히 잔인하다. 시황 35년 조궁 위남 상림원속에 일찍이 앞전각 아방을 지었다. 2세 원년에 앞전각 아방을 지었으나, 아방궁은 완성치 못했다.
2세원년에 말하기를: “선제가 함양조정을 작게 하여, 아방을 당실로 썼다. 지금 아방궁만을 풀어준 건 선제의 착오다. “ 다시 아방궁을 지어라. 2년 겨울 우승상거질(右丞相去疾), 좌승상사(左丞相斯), 장군풍겁(將軍馮劫)이 아방궁 지음을 간하였다. 2세는 노하여 거질등 관리를 물리쳤다. 거질과 겁은 자살하고, 사는 5형(五刑)을 받았다. 진의 말기까지 아방궁은 완성치 못하였다.
역사에 의하면: 26년간 진은 제후를 격파하고, 그는 궁실을 써서, 함양 북편 언덕위에 올렸고, 남으로는 위수에 임하고, 옹문동편으로부터 전각, 집, 복도와 주각이 거기에 속했다. 획득한 미인과 종고(鐘鼓)로 가득 채웠다.
두목글에 “비빈잉장과 왕자황손은 누에서 전각으로 내려와 연을 타고 진으로 달려갔다. 아침에 노래부르고, 밤에는 현을 뜯어 진궁인이 되었도다. “ 하며 그때 상황을 지적하였다.
사실 아방궁이란 이름은 없었고, “36년간 보지 못했다”함은 아방의 사실이 아니다. 내가 이미 분별한 바, 후에 정대창의 옹록[程大昌《雍錄》]과 조여시의 빈퇴록[趙與時《賓退錄》]을 읽었더니 모두 분별하여, 대락 서로 동일하였다.
이 시인은 고소성 밖에 있는 풍교란 다리 근방에서 하룻밤 숙박을 하였다.
서리가 하늘에 가득하다고 하니 늦은 가을인 듯하다.
한밤중에 멀리 있는 유명한 한산사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네...